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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학 총서 2 정조의 무치 - 문무를 갖춘 완전한 나라를 꿈꾸다

허태구(저자) | 휴먼역사 | 23,000원 | 2020.11.30 | 312p | ISBN : 9791160805109 | 94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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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학 총서 2 정조의 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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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과연 근대의 문을 연 계몽군주였는가?

정조와 그의 시대를 당대의 맥락에서 재해석한
최초의 ‘정조학’ 연구 총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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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소개

1. 고정된 이미지를 깨고 되살아난 정조와 그의 시대
정조는 누가 뭐래도 조선을 대표하는 왕이다. 최근에는 ‘성군’ 하면 첫손에 꼽히는 세종보다도 세간의 주목을 더 받는 듯하다. 두 가지 이미지가 중첩되어 보이기 때문이 아닐까? 첫 번째는 성군의 이미지이다. 정조를 학자군주이자 만인의 모범이 된 인물이라며 ‘철인(哲人)’으로 평가하는가 하면, 다방면의 뛰어난 재능으로 시대의 변화를 통찰하며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했던 군주라며 정조의 무결점 면모를 부각시키기도 한다. 그리고 여기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수원 화성이 주는 시각적 효과까지 더해진다. 두 번째는 ‘비운의 군주’ 이미지다. 소설 《영원한 제국》(1993) 이후 드라마 〈이산〉(2007), 영화 〈역린〉(2014) 등 대중 매체를 통해,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여의고 군주가 되어서도 적의 끊임없는 암살 기도에 시달리는, 그래서 연민의 정을 불러일으키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정조어찰첩》이 발견되자 정조는 마키아벨리스트가 되었다. 정치적으로 대립했던 것으로 알려진 심환지와 비밀편지를 주고 받으며 막후에서 조정을 이끌어나간 노련한 정치가 말이다.
그동안 우리는 200년 전 정조를 현대의 시선에서 보아왔다. 우리 역사에서 18세기 후반은 ‘조선의 르네상스’여야 했고, 그에 발맞춰 정조는 구습을 개혁하여 근대 국가의 여명을 준비한 계몽군주 또는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노련한 정치가라는 두 가지 얼굴을 지니게 되었다.
과연 정조는 이러한 해석들에 만족할까? 이번에 출간된 ‘정조학 총서’(전 4권)는 정조에 대한 기왕의 고정된 이미지를 또 한 번 버릴 것을 제안한다. 새롭게 정조에 다가가는 방법은 “오직 정조의 ‘말과 행동’(텍스트)을 ‘역사적 맥락’(컨텍스트)을 고려하여 되도록 당대의 관점과 시야에서 해석하는 것이다.”(4권 ‘책을 펴내며’에서)
당대의 사료가 보여주는 정조는 익히 알려진 모습과는 달리 성리학의 가치가 실현되는 나라를 완성하기 위한 개혁을 추진한 군주였다. 이 총서는 정조가 추구한 성리학의 가치를 중심에 놓고, 문·무·예·법이라는 네 분야로 나누어 정조와 그의 시대를 총체적이고 객관적으로 통찰한 최초의 ‘정조학’ 연구 성과다. 정조의 삶과 그가 남긴 글을 현대의 시선에 가두지 않고 18세기 후반 조선이라는 당대의 맥락에서 재해석하고 그 의미를 찾아가며, 정조와 그의 시대의 참모습을 되살려낸다.
 
 
2. 조선시대 연구자 4인의 ‘정조시대 새롭게 조명하기’
‘정조학 총서’는 조선시대사 연구자 4인이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학총서 지원 아래 6년의 노력 끝에 도출한 결과물이다. 그동안 조선의 18세기는 주로 근대주의의 시야에서 설명되어왔고, 그에 따라
 
정조는 근대 국가의 여명을 준비하는 계몽군주로 묘사되곤 했다. 그러나 4인의 필진이 사료를 읽으며 깨달은 것은, 뜻밖에도 정조가 실학의 시대를 연 계몽군주이기보다는 성리학의 신봉자였다는 점이다. 네 사람은 이 점에 의견을 같이하고 정조와 그의 시대에 대한 새로운 조명에 나섰다.
총서 필진은 정조와 그의 말들(텍스트)을 18세기 후반의 조선이라는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발화된 특수한 조건의 산물’로 해석하고 그 의미를 발견하고자 했다. 기왕의 편견으로부터 시야를 돌려 정조의 말을 당대의 맥락에서 명확히 이해할수록, 정조를 현재의 목적론에 가두거나 과거의 골동품으로 내버려두지 않고 현재에 되살릴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네 사람은 각각 자신의 전문 분야인 문학[文], 군사[武], 교화[禮]와 법치[法]를 주제로 설정하고, 정조와 그의 시대를 관통하는 역사적 조건 가운데 정학(正學), 즉 성리학을 그 중심에 놓은 뒤, 각자의 개성을 살려 글을 완성했다. 백승호는 ‘성리학적 세계관의 구현’을 향한 정조의 문학론을, 허태구는 ‘문무겸전(文武兼全)’을 기초로 한 외교국방론을, 김지영은 ‘수신제가에서 치국평천하’에 이르는 예교론을, 김호는 ‘무위이치(無爲而治)의 형정론’을 화두 삼아 각자 정조와 그의 시대를 탐색했다.
 
 
3. ‘정조학 총서’의 주요 내용과 구성
 
정조학 총서 1_ 《정조의 문치—글쓰기로 인의의 정치를 펴다》
정조는 탁월한 학문적 능력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문학에도 뛰어난 군주였다. 이 책에서는 정조의 ‘문학’을 군주의 통치 행위와 관련된 넓은 의미의 글쓰기라는 개념으로 보고 그가 문학을 통해 통치를 구현해가는 양상을 밝혀 정조의 문학과 정치의 긴밀한 관련성을 분석한다.
1부에서는 정조가 세손 시절 창작했던 텍스트를 검토했다. 국왕의 후계자로서 수학기(修學期)를 거치면서 지배 이념을 점차 내면화하는 과정을 보인다. 2부에서는 정조가 즉위한 뒤 국왕이라는 특수한 입장이 반영된 문학을 분석했다. 전통 시대 군주는 문학을 통치의 핵심적인 요소로 간주하였다. 군주에게 문학은 경국(經國)과 관련되어 있었고, 정치적 난관에 봉착했을 때 글쓰기로 타개하기도 했다. 3부에서는 정조의 문학을 중심에 두고 정조의 문치와 관련된 신료들의 문학을 분석했다.
 
정조학 총서 2_ 《정조의 무치—문무를 갖춘 완전한 나라를 꿈꾸다》
이 책은 근대 서구의 척도로 평가해온 정조대 군사 분야의 기획과 성취를 당대 사회의 맥락에서 새로이 분석했다. 이 시기 군사사의 주요 이슈인 장용영 신설, 화성 축조, 군제 개편 시도, 병서 편찬 등의 성과와 한계를 살피고, 이를 둘러싼 정조의 대외 인식과 문무겸전론의 함의를 재해석한다.
1부에서는 정조대 외교 활동의 실상과 노선, 그 인식론적 기반이 되는 대명의리의 내용과 성격, 마지막으로 정조의 대외 인식과 지방군 전력 정비의 상관관계 등을 검토했다. 2부에서는 정조의 군제 개혁과 화성 방어 체제 정비의 과정과 함의를 다양한 측면에서 살펴봤다. 3부에서는 정조의 문?무 인식이란 주제로 정조가 제기한 문무겸전론의 본질과 목적이 무엇이었으며, 이를 위해 정조는 어떤 정책을 시행했는지 분석했다.
 
 
정조학 총서 3_ 《정조의 예치—예를 바로잡아 백성의 마음을 기르다》
정조는 군사(君師)를 자임하며 가족, 지역사회, 나라, 천하라는 모든 범주에 속하는 조선의 제도와 실천을 정비하여, 풍요와 안정, 화합을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백성을 길러내려 했다. 이 책은 예교와 예치에 대한 정조의 사유와 실천을 살피고 재구성하며, 정조대 ‘개혁’의 진면모를 드러낸다.
1부에서는 정조가 사친, 즉 사도세자에 대한 궁원의례와 동생, 고모 등 친속에 대한 처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나갔는지 살펴봤다. 2부에서는 정조의 《향례합편》에 담긴 지역사회에서의 예제와 예교에 대한 문제의식을 검토했다. 3부에서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거행했던 주요 학교 의례(성균관 식당례, 춘당대 식당례)의 실천과 그 의미를 살펴봤다. 4부에서는 정조대 국가례 시행에서 특별히 돋보이는 두 방면의 주제를 검토하여, 정조가 왕조의 가치를 어떤 면에서 강조하려 했는지 알아보았다. 5부에서는 정조의 천하례 인식을 청?일본과 함께하는 천하에서 다 같이 오랑캐로 전락하지 않기 위한 노력의 차원에서 읽어내고자 했다.
 
정조학 총서 4_ 《정조의 법치—법의 저울로 세상의 바름을 살피다》
정조는 인륜의 교화를 통해 백성의 자발적 질서가 이루어지기를 희망하며, 공정한 판결을 위해 직접 살옥사건의 판결문을 살폈다. 이 책은 정조의 유교형정론을 깊이 있게 분석하고, 당대 인간의 권리와 감정, 사회가치와 정의의 문제라는 넓은 시야로 ‘조선의 법치’를 고찰한다.
1부에서는 유교형정론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덕주형보(德主刑補)의 의미에 대해 살펴보고 조선판 《신주무원록》의 증보 과정을 정리했다. 2부에서는 《일득록》의 내용을 분석하여 정조가 시중의 묘, 법과 정·리의 조화, 물정의 흥기를 어떻게 현실화하려 했는지 살펴봤다. 3부에서는 정조가 ‘견자’와 ‘광자’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이유를 살펴보고, 이러한 인식을 살옥심리 과정에 어떻게 반영했는지 검토했다. 4부에서는 정조 사후 그의 형정론이 어떻게 변주되는지 정원용의 관형론과 정약용의 형정론을 통해 살펴봤다.
 
 
4. 책 속에서
 
정조대 군사사 연구가 중요한 이유
한국 군사사에서 정조대와 고종대 사이의 극적 차이와 간극은, 조선 후기의 군사적 발전과 변화를 서구의 기준이 아니라 당대의 맥락에서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조선 후기 군사 분야의 여러 성취와 한계를 전체 사회 구조와의 관계 속에서 새롭게 독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성취의 정점이자 단절의 시초가 되는 정조대 군사사는 매우 중요한 연결고리이자 실마리가 된다.
―머리말 〈정조의 군사적 기획과 당대 사회〉(17쪽) 중에서
 
대청 관계에 냉정한 태도로 임하다
정조가 이처럼 대청 사대에 진력한 배경에는 중원의 패권을 장악한 청의 안정이 곧 조선의 안위와 연동된다는 무시할 수 없는 현실 또한 잠재해 있었다. 이미 영조대부터 청과 조선의 안보가 밀접하
 
게 연관되어 있다는 군신의 발언이 자주 보인다. 뿐만 아니라, 강포하고 미개한 몽골이나 준가르부보다는 차라리 청이 낫다는 냉정한 판단도 하고 있었다. 정조와 그의 신료들 역시 영조와 생각이 다르지 않았다. 강성한 몽골이 잠재적 위험이라고 관성적으로 인식했지만, 그렇다고 단기간 내에 청이 몰락할 거라고 예상한 것은 아니었다. 여기에는 자신들이 목도한 건륭제의 개인적 능력에 대한 믿음도 깔려 있었다. 정약용(丁若鏞)은 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지리적 형세가 임진왜란과 같은 일본의 전면적 침략을 제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였을 뿐, 청에 대한 특별한 경계심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1부 〈정조의 대외 인식과 외교〉(67~68쪽) 중에서
 
대명의리를 실천해야만 했던 정조
인조 이후 조선의 국왕들은 무엇보다도 1637년 조선을 대표하여 대명의리를 부정한 인조의 자손이었기 때문에, 대명 의리에 포함된 중화적 가치가 조선 내에서 동요되지 않는 한, 더욱 열과 성을 다하여 대명의리를 예(禮)와 사(史)의 차원에서 실천해야만 하는 위치에 있었다. 정조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하지 않았다면, 아마 그들은 광해군과 같이 배리(背理) 또는 배교(背敎)의 차원에서 축출당했거나 지지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1부 〈정조의 대외 인식과 외교〉(99쪽) 중에서
 
진법을 통해 선왕의 제도를 이어받다
아울러 위의 사료에서 보이는 것처럼 정조는 병서 편찬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접한 진법을 실제 자신의 군사로 하여금 자주 습진하게 하였다. 이러한 훈련은 물론 군사 기술의 습득이라는 측면에서 볼 수도 있지만, 과연 이렇게 복잡한 진법이 절체절명의 실전에서 그대로 활용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없지 않다. …… 정조의 입장에서 보면 오위진법의 시연은 다름 아닌 선왕의 고제,
즉 고례를 실천한다는 측면에서 효과가 있었다. 더욱이 이것이 능행(陵幸)을 오가는 도중에 시행되었다는 점은 더욱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정조 왕권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군사력은 이러한 습진의 형태로 시각화되어 연도(沿道)의 사민(士民)에게 전달되었을 것이다.
―2부 〈정조의 군제 개혁과 화성 방어 체제 정비〉(160~161쪽) 중에서
 
정조의 ‘이순신론’
정조는 왜 그(이순신)를 문무겸전의 상징적 인물로 지목하였던 것일까?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고 생각한다. 우선, 그의 비루하지 않았던 행적과 인품이다. 그는 벼슬을 탐내어 고위 관료에게 줄을 대거나 청탁하지 않았고, 상관의 명령이라도 부당하고 불의한 것이면 사리를 따지며 이행하지 않았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불이익을 당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자신의 도리를 저버리지 않았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무장들은 용력 (勇力) 이 세거나 무공만 높을 뿐 염치없는 행위를 마다하지 않는다.’는 선입견을 깨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다만 정치적 필요에 따라 관행적으로 주는 선물인 부채 등을 중앙의 고관에게 상납하는 융통성을 보이기도 하였다. ―3부 〈정조의 문·무 인식과 대책〉(248쪽) 중에서
 
정조의 상무 정책을 청 황제 강희제와 비교하면?
반농·반목의 만주족 전통에서 성장한 강희제의 군사 지식은 정조보다 훨씬 더 구체적이었다. 기사에 능숙하였고 총포를 쏘는 것도 꺼리지 않았으며, 작전은 물론 행군·보급·통신·기상 관측에 대한 지식도 수준급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준가르부의 수장 갈단을 격파하기 위한 원정길에 올라 굶주림에 시달리며 사막을 행군할 정도의 실전형 군주였다. 정지된 과녁을 겨냥한 정조의 활쏘기와 달리 강희제의 활은 살아 움직이는 맹수의 몸통에 꽂히곤 하였다. 여기에서 희열을 느끼는 강희제의 심성은 만
 
물을 낳아 기르는 천지(天地)의 인(仁)을 본받고자 했던 군사(君師) 정조의 마음가짐과는 확실히 달랐을 것이다. 요컨대 정조의 상무 정책 관련 활동은 철저히 유교적 전통 내에서 군주에게 규범적으로 요청되는 의식을 모범적으로 행한 것이었다. ―3부 〈정조의 문·무 인식과 대책〉(264~265쪽) 중에서
 
유교적 전통 안에서 문과 무의 겸전을 지향하다
정조의 문무겸전론은 어디까지나 유교적 전통 안에 포섭되는 이념이었으며, 그의 군사 개혁도 근대적 군대를 지향하거나 국방력의 획기적 강화를 위해 추진되었다기보다 고제와 고례를 지향한 상징적 조치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시도는 당대 맥락에서는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정책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요컨대 군사 분야를 포함한 그의 전방위적 개혁은 군사(君師)를 자임한 철인군주(哲人君主) 정조가 자신의 소명을 철저하게 자각하고 이행한 결과물이었다.
―맺음말 〈예와 통으로 문무일체의 이상을 추구한 국왕, 정조〉(286쪽) 중에서
 

저자소개

허태구 (저자)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국민대학교, 경인교육대학교, 동덕여자대학교 등에 출강하였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선임연구원과 학예연구사를 거쳐 현재 가톨릭대학교 국사학과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로 중화주의(中華主義)와 연관된 조선 후기 정치사, 군사사, 외교사, 사상사 분야를 연구하고 있다. 주요 논저로 〈중봉 조헌의 중국과 중화〉, 〈병자호란 이전 조선의 군사력 강화 시도와 그 한계〉, 〈〈인조교서〉와 척화의 시대〉, 〈최명길의 주화론과 대명의리〉, 《병자호란과 예(禮), 그리고 중화(中華)》, 《조선의 국가의례, 오례》(공저) 등이 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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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정조학 총서’를 펴내며|책을 펴내며

머리말 정조의 군사적 기획과 당대 사회

1부 정조의 대외 인식과 외교
1. ‘진하외교’와 대청 관계
2. 역지통신 교섭과 대일 관계
3. 대보단 제례와 ‘진하외교’의 공존
4. 지방군의 현황

2부 정조의 군제 개혁과 화성 방어 체제 정비

1. 친위 체제 구축과 장용영 설치
2. 수어청·총융청의 통합 시도와 군제 개혁
3. 병서 편찬과 오위제 복구의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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