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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학 총서(세트) - 정조의 문무예법

김지영,김호,백승호,허태구(저자) | 휴먼역사 | 90,000원 | 2020.11.30 | 0p | ISBN : 9791160805086 | 94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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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학 총서(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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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과연 근대의 문을 연 계몽군주였는가?

정조와 그의 시대를 당대의 맥락에서 재해석한
최초의 ‘정조학’ 연구 총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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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소개

1. 고정된 이미지를 깨고 되살아난 정조와 그의 시대
정조는 누가 뭐래도 조선을 대표하는 왕이다. 최근에는 ‘성군’ 하면 첫손에 꼽히는 세종보다도 세간의 주목을 더 받는 듯하다. 두 가지 이미지가 중첩되어 보이기 때문이 아닐까? 첫 번째는 성군의 이미지이다. 정조를 학자군주이자 만인의 모범이 된 인물이라며 ‘철인(哲人)’으로 평가하는가 하면, 다방면의 뛰어난 재능으로 시대의 변화를 통찰하며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했던 군주라며 정조의 무결점 면모를 부각시키기도 한다. 그리고 여기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수원 화성이 주는 시각적 효과까지 더해진다. 두 번째는 ‘비운의 군주’ 이미지다. 소설 《영원한 제국》(1993) 이후 드라마 〈이산〉(2007), 영화 〈역린〉(2014) 등 대중 매체를 통해,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여의고 군주가 되어서도 적의 끊임없는 암살 기도에 시달리는, 그래서 연민의 정을 불러일으키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정조어찰첩》이 발견되자 정조는 마키아벨리스트가 되었다. 정치적으로 대립했던 것으로 알려진 심환지와 비밀편지를 주고 받으며 막후에서 조정을 이끌어나간 노련한 정치가 말이다.
그동안 우리는 200년 전 정조를 현대의 시선에서 보아왔다. 우리 역사에서 18세기 후반은 ‘조선의 르네상스’여야 했고, 그에 발맞춰 정조는 구습을 개혁하여 근대 국가의 여명을 준비한 계몽군주 또는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노련한 정치가라는 두 가지 얼굴을 지니게 되었다.
과연 정조는 이러한 해석들에 만족할까? 이번에 출간된 ‘정조학 총서’(전 4권)는 정조에 대한 기왕의 고정된 이미지를 또 한 번 버릴 것을 제안한다. 새롭게 정조에 다가가는 방법은 “오직 정조의 ‘말과 행동’(텍스트)을 ‘역사적 맥락’(컨텍스트)을 고려하여 되도록 당대의 관점과 시야에서 해석하는 것이다.”(4권 ‘책을 펴내며’에서)
당대의 사료가 보여주는 정조는 익히 알려진 모습과는 달리 성리학의 가치가 실현되는 나라를 완성하기 위한 개혁을 추진한 군주였다. 이 총서는 정조가 추구한 성리학의 가치를 중심에 놓고, 문·무·예·법이라는 네 분야로 나누어 정조와 그의 시대를 총체적이고 객관적으로 통찰한 최초의 ‘정조학’ 연구 성과다. 정조의 삶과 그가 남긴 글을 현대의 시선에 가두지 않고 18세기 후반 조선이라는 당대의 맥락에서 재해석하고 그 의미를 찾아가며, 정조와 그의 시대의 참모습을 되살려낸다.
 
 
2. 조선시대 연구자 4인의 ‘정조시대 새롭게 조명하기’

‘정조학 총서’는 조선시대사 연구자 4인이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학총서 지원 아래 6년의 노력 끝에 도출한 결과물이다. 그동안 조선의 18세기는 주로 근대주의의 시야에서 설명되어왔고, 그에 따라
 
정조는 근대 국가의 여명을 준비하는 계몽군주로 묘사되곤 했다. 그러나 4인의 필진이 사료를 읽으며 깨달은 것은, 뜻밖에도 정조가 실학의 시대를 연 계몽군주이기보다는 성리학의 신봉자였다는 점이다. 네 사람은 이 점에 의견을 같이하고 정조와 그의 시대에 대한 새로운 조명에 나섰다.
총서 필진은 정조와 그의 말들(텍스트)을 18세기 후반의 조선이라는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발화된 특수한 조건의 산물’로 해석하고 그 의미를 발견하고자 했다. 기왕의 편견으로부터 시야를 돌려 정조의 말을 당대의 맥락에서 명확히 이해할수록, 정조를 현재의 목적론에 가두거나 과거의 골동품으로 내버려두지 않고 현재에 되살릴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네 사람은 각각 자신의 전문 분야인 문학[文], 군사[武], 교화[禮]와 법치[法]를 주제로 설정하고, 정조와 그의 시대를 관통하는 역사적 조건 가운데 정학(正學), 즉 성리학을 그 중심에 놓은 뒤, 각자의 개성을 살려 글을 완성했다. 백승호는 ‘성리학적 세계관의 구현’을 향한 정조의 문학론을, 허태구는 ‘문무겸전(文武兼全)’을 기초로 한 외교국방론을, 김지영은 ‘수신제가에서 치국평천하’에 이르는 예교론을, 김호는 ‘무위이치(無爲而治)의 형정론’을 화두 삼아 각자 정조와 그의 시대를 탐색했다.

3. ‘정조학 총서’의 주요 내용과 구성
 
정조학 총서 1_ 《정조의 문치—글쓰기로 인의의 정치를 펴다》
정조는 탁월한 학문적 능력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문학에도 뛰어난 군주였다. 이 책에서는 정조의 ‘문학’을 군주의 통치 행위와 관련된 넓은 의미의 글쓰기라는 개념으로 보고 그가 문학을 통해 통치를 구현해가는 양상을 밝혀 정조의 문학과 정치의 긴밀한 관련성을 분석한다.
1부에서는 정조가 세손 시절 창작했던 텍스트를 검토했다. 국왕의 후계자로서 수학기(修學期)를 거치면서 지배 이념을 점차 내면화하는 과정을 보인다. 2부에서는 정조가 즉위한 뒤 국왕이라는 특수한 입장이 반영된 문학을 분석했다. 전통 시대 군주는 문학을 통치의 핵심적인 요소로 간주하였다. 군주에게 문학은 경국(經國)과 관련되어 있었고, 정치적 난관에 봉착했을 때 글쓰기로 타개하기도 했다. 3부에서는 정조의 문학을 중심에 두고 정조의 문치와 관련된 신료들의 문학을 분석했다.
 
정조학 총서 2_ 《정조의 무치—문무를 갖춘 완전한 나라를 꿈꾸다》
이 책은 근대 서구의 척도로 평가해온 정조대 군사 분야의 기획과 성취를 당대 사회의 맥락에서 새로이 분석했다. 이 시기 군사사의 주요 이슈인 장용영 신설, 화성 축조, 군제 개편 시도, 병서 편찬 등의 성과와 한계를 살피고, 이를 둘러싼 정조의 대외 인식과 문무겸전론의 함의를 재해석한다.
1부에서는 정조대 외교 활동의 실상과 노선, 그 인식론적 기반이 되는 대명의리의 내용과 성격, 마지막으로 정조의 대외 인식과 지방군 전력 정비의 상관관계 등을 검토했다. 2부에서는 정조의 군제 개혁과 화성 방어 체제 정비의 과정과 함의를 다양한 측면에서 살펴봤다. 3부에서는 정조의 문?무 인식이란 주제로 정조가 제기한 문무겸전론의 본질과 목적이 무엇이었으며, 이를 위해 정조는 어떤 정책을 시행했는지 분석했다.
 
 
정조학 총서 3_ 《정조의 예치—예를 바로잡아 백성의 마음을 기르다》
정조는 군사(君師)를 자임하며 가족, 지역사회, 나라, 천하라는 모든 범주에 속하는 조선의 제도와 실천을 정비하여, 풍요와 안정, 화합을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백성을 길러내려 했다. 이 책은 예교와 예치에 대한 정조의 사유와 실천을 살피고 재구성하며, 정조대 ‘개혁’의 진면모를 드러낸다.
1부에서는 정조가 사친, 즉 사도세자에 대한 궁원의례와 동생, 고모 등 친속에 대한 처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나갔는지 살펴봤다. 2부에서는 정조의 《향례합편》에 담긴 지역사회에서의 예제와 예교에 대한 문제의식을 검토했다. 3부에서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거행했던 주요 학교 의례(성균관 식당례, 춘당대 식당례)의 실천과 그 의미를 살펴봤다. 4부에서는 정조대 국가례 시행에서 특별히 돋보이는 두 방면의 주제를 검토하여, 정조가 왕조의 가치를 어떤 면에서 강조하려 했는지 알아보았다. 5부에서는 정조의 천하례 인식을 청?일본과 함께하는 천하에서 다 같이 오랑캐로 전락하지 않기 위한 노력의 차원에서 읽어내고자 했다.
 
정조학 총서 4_ 《정조의 법치—법의 저울로 세상의 바름을 살피다》
정조는 인륜의 교화를 통해 백성의 자발적 질서가 이루어지기를 희망하며, 공정한 판결을 위해 직접 살옥사건의 판결문을 살폈다. 이 책은 정조의 유교형정론을 깊이 있게 분석하고, 당대 인간의 권리와 감정, 사회가치와 정의의 문제라는 넓은 시야로 ‘조선의 법치’를 고찰한다.
1부에서는 유교형정론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덕주형보(德主刑補)의 의미에 대해 살펴보고 조선판 《신주무원록》의 증보 과정을 정리했다. 2부에서는 《일득록》의 내용을 분석하여 정조가 시중의 묘, 법과 정·리의 조화, 물정의 흥기를 어떻게 현실화하려 했는지 살펴봤다. 3부에서는 정조가 ‘견자’와 ‘광자’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이유를 살펴보고, 이러한 인식을 살옥심리 과정에 어떻게 반영했는지 검토했다. 4부에서는 정조 사후 그의 형정론이 어떻게 변주되는지 정원용의 관형론과 정약용의 형정론을 통해 살펴봤다.
 
 
4. 책 속에서

 
정조의 ‘글쓰기 정치’
정조는 18세기 개혁군주였다는 통념이 일반적인데, 그가 문학(文學)에 뛰어난 군주였다는 점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문학을 통해서 정치적 담론을 생산하고 이를 통해 통치의 정당성을 획득해갔다. 정조는 외척과 권신을 배척했기 때문에 즉위 직후 권력의 물질적 기반이 공고하지 못했다. 대신 학문적 역량을 바탕으로 여러 형식의 글쓰기를 통해 당시 사대부 관료들의 동의와 지지를 구하려고 하였다.
―1권 《정조의 문치》, 머리말 〈정조의 문학과 문치〉(13쪽) 중에서
 
시에 정치적 함의를 담다
정조는 문학의 장르적 관습을 지켜 시문을 창작하면서도 여기에 정치적인 함의를 담아내었다. 본인이 시를 이러한 방법으로 창작했기에, 그는 신하들이 창작한 시의 정치적 의미를 묻곤 하였다. 심환지와 이만수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정조는 1798년 3월 17일에 보낸 어찰에서 심환지가 지은 한시에
 
있는 “반나마 비었다”라는 구절의 의미를 물었다. 누군가가 벽파에서 이탈한 것은 아닌지 그 정치적 함의를 물었다. 이만수에게는 자신이 어제시에서 미처 표현하지 못했던 정치적 의도를 이만수의 갱재시를 통해 구현하고자 하는 의사를 전했다. 이와 같은 정조의 문학은 형체 없는 권력을 문학을 통해 형상화하는 행위로 해석할 수 있다. ―1권 《정조의 문치》, 2부 〈문학을 통한 담론 생성과 통치 정당성 제고〉(99쪽) 중에서
 
정조의 ‘이순신론’
정조는 왜 그(이순신)를 문무겸전의 상징적 인물로 지목하였던 것일까?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고 생각한다. 우선, 그의 비루하지 않았던 행적과 인품이다. 그는 벼슬을 탐내어 고위 관료에게 줄을 대거나 청탁하지 않았고, 상관의 명령이라도 부당하고 불의한 것이면 사리를 따지며 이행하지 않았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불이익을 당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자신의 도리를 저버리지 않았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무장들은 용력 (勇力) 이 세거나 무공만 높을 뿐 염치없는 행위를 마다하지 않는다.’는 선입견을 깨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다만 정치적 필요에 따라 관행적으로 주는 선물인 부채 등을 중앙의 고관에게 상납하는 융통성을 보이기도 하였다.
―2권 《정조의 무치》, 3부 〈정조의 문·무 인식과 대책〉(248쪽) 중에서
 
유교적 전통 안에서 문과 무의 겸전을 지향하다
정조의 문무겸전론은 어디까지나 유교적 전통 안에 포섭되는 이념이었으며, 그의 군사 개혁도 근대적 군대를 지향하거나 국방력의 획기적 강화를 위해 추진되었다기보다 고제와 고례를 지향한 상징적 조치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시도는 당대 맥락에서는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정책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요컨대 군사 분야를 포함한 그의 전방위적 개혁은 군사(君師)를 자임한 철인군주(哲人君主) 정조가 자신의 소명을 철저하게 자각하고 이행한 결과물이었다.
―2권 《정조의 무치》, 맺음말 〈예와 통으로 문무일체의 이상을 추구한 국왕, 정조〉(286쪽) 중에서
 
만민을 가르치면 책임 있는 실천으로 이끌 수 있다
정조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기 위한 도덕적 능력은 하늘이 모든 사람들에게 내려준 것이며, 모든 사람들이 타고난 것이라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만민을 가르쳐 자율적인 도덕주체로 거듭나게 하면, 그들 각자가 자발적으로 가정과 지역사회에서 본심에 토대한 책임 있는 실천들을 해나갈 수 있다고 보았다. 국가가 행정력을 써서 일일이 개입하고 간섭할 필요도 없고 형벌로 위협하고 감시하지 않아도 집집마다 편안하고 다툼 없이 안정될 수 있는 나라, 그런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례, 향례, 학교례 등 정부 이외의 영역에서의 예제에 더 힘을 기울이고 실천해야 했다.
―3권 《정조의 예치》, 머리말 〈정조의 조선 예제 인식과 변통론〉(46쪽) 중에서
 
정조가 관례와 혼례를 《향례합편》에 넣은 문제의식
조선에서도 조선의 실정에 맞게 가례서를 만들며 신유학적 가족 모델을 정착시키고자 노력해왔다. 상례와 제례는 과도할 정도로 행해졌지만, 정작 관례와 혼례는 예제대로 제대로 실행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신유학적 문제의식에 따라 가정을 교육의 첫 장소로 삼고, 가정에서 배운 공공적인 마음을 사회로 확장해나가길 기대했던 이들에게는 큰 문제로 여겨졌을 것이다. …… 신유학적 가례 제도의 본의를 되살려 ‘가’가 만민 교화의 첫 장소로 기능할 수 있도록 되돌려야 했다. 정조가 풍속 교화를 돕기 위해 《향례합편》을 편찬하면서 이미 과도하게 실행되고 있는 상례와 제례 대신 관례와 혼례를 넣도록 한 문제의식은 이 지점에 있었다.
―3권 《정조의 예치》, 2부 〈향례: 지방의 자발적 도덕화에 대한 기대와 《향례합편》〉(146~147쪽) 중에서
 
태학 유생들과 함께 밥을 먹다
1783년 8월에도 춘당대에 나아가 태학 유생을 불러 강을 하고 나서 식당을 베풀었다. 정조는 “정자 (程子)는 승사(僧舍)에 모여 앉아 먹는 것을 보고도 삼대의 위의가 있다고 감탄했으니, 대학의 식당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북을 쳐서 나아가고 나이 순서로 앉는 것이 질서정연하여 볼 만하기에 내 기꺼이 유생들과 함께하는 것이다. 나물 반찬이 비록 초라하나 내주(內廚)의 진수성찬보다 나으니, 경들은 각각 배불리 먹도록 하라.”고 하여, 북을 쳐서 나아가고 나이순으로 앉는 태학의 예제에서 성대했던 옛 시절의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기에 식당에서 기꺼이 유생들과 함께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식당례는 꼭 태학 유생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일반 사회의 각종 차별 관행에서 벗어나 나이에 따라 존중하고 양보하는 새로운 문화를 익히는 것은, 모든 학교의 학생들에게 필요한 가르침이었다.
―3권 《정조의 예치》, 3부 〈학례: 공교육 정상화의 노력과 태학 예제의 정비〉(190~191쪽) 중에서
 
정조가 살옥 심리에 밤새워가며 정성을 쏟았던 이유
조선의 형정은 교화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 정조는 자신의 판결문을 통해 덕화의 의지를 천명했을 뿐 아니라 관료들의 형정에 영향을 미치고자했으며, 나아가 백성들의 행동을 바루고자 했다. …… 정조는 살옥사건을 심리하면서 천하의 공론, 즉 물정에 부합하는 최선의 판결을 얻음으로써 당대의 인정세태에 호응하고자 했다. 물정에 부합하는 시중의 판결을 내리는 순간, 그 재판 결과는 민심에 공평한 법 감정으로 수용될 것이요 원통함은 저절로 사라질 터였다. 정조가 살옥 심리에 밤새워가며 정성을 쏟았던 이유가 여기 있었다.
―4권 《정조의 법치》, 머리말 〈‘권선징악’의 통치론〉(24, 54쪽) 중에서
 
차라리 관대하다고 비판받을지언정 지나쳐서는 안 된다
형벌은 불가피하지만 될 수 있으면 처벌을 가볍게 하여 호생지덕을 펼쳐야 했다. 정조는 이른바 초옥(楚獄)의 고사를 경계로 삼았다. 초왕(楚王)의 감옥에 사람이 넘쳤다는 일화는 중국 한대 명제(明帝)의 동생 초왕이 모반한 뒤 이와 연관되어 무고하게 죽은 사람이 많았던 일을 비판한 것이다. 왕이 지나치게 많은 사람을 죽이고도 이를 기쁘게 생각한 나머지 나라가 망했다는 것이다.
정조는 형정은 차라리 관대하다고 비판받을지언정 지나쳐서는 안 되고, 가볍게 처벌하는 잘못을 저지를지언정 질질 끌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정조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한 누군가가 왕의 의지가 나약하다고 비판하자, 정조는 엄형을 일삼다가 나라가 망한 초옥의 고사를 지적한 것이다.
―4권 《정조의 법치》, 2부 〈《일득록》을 통해 본 정조의 법치〉(128쪽) 중에서
 
광자와 의협을 칭송한 정조의 교화론
공정한 사회는 불의와 부도덕에 침묵해서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정조는 함묵과 교언영색을 비판하는 동시에 진정한 광자와 의협의 용기를 칭송했다. 부당함에 과감히 맞설 수 있는 광자들, 이들이야말로 정의로운 공동체를 만들 수 있었다. …… 그리고 천금을 주고라도 광자의 용기를 칭찬해야 한다던 다산의 생각은, 명덕(明德)을 부여받은 그 누구라도 불의와 부도덕을 비판하고 인간다움을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던 정조의 교화론에 바탕했다. 정조의 통치 기획, 다시 말해 명예를 아는 사람들과 진정한 광자들에 의해 말세(末世)의 조선이 일신(日新)할 것이라는 기대는 소민들에 대한 교화, 인간다움의 도리를 강조한 형정 운영과 그 맥락이 잇닿아 있었다. ―4권 《정조의 법치》, 3부 〈정조의 명예론과 《심리록》〉(246쪽) 중에서
 
 

저자소개

백승호 (저자)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조시대 정치적 글쓰기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남대학교 국어국문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전통시대 문학과 정치라는 주제로 정조 연간 한문학을 연구하고 있다. 주요 논저로 〈번암 채제공 문학 연구〉, 〈정조시대 정치적 글쓰기 연구〉, 《정조의 비밀 어찰, 정조가 그의 시대를 말하다》(공저), 《정조의 신하들》 등이 있고, 역서로 《정조어찰첩》(공역), 《소문사설, 조선의 실용지식 연구노트》(공역) 등이 있다.
허태구 (저자)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국민대학교, 경인교육대학교, 동덕여자대학교 등에 출강하였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선임연구원과 학예연구사를 거쳐 현재 가톨릭대학교 국사학과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로 중화주의(中華主義)와 연관된 조선 후기 정치사, 군사사, 외교사, 사상사 분야를 연구하고 있다. 주요 논저로 〈중봉 조헌의 중국과 중화〉, 〈병자호란 이전 조선의 군사력 강화 시도와 그 한계〉, 〈〈인조교서〉와 척화의 시대〉, 〈최명길의 주화론과 대명의리〉, 《병자호란과 예(禮), 그리고 중화(中華)》, 《조선의 국가의례, 오례》(공저) 등이 있다.
김지영 (저자)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조선시대 국가 의례에 대한 공부에서 출발해 예치론에 기반한 국가 통치, 정치 문화, 일상 문화로 연구 분야를 확장하고 있다. 주요 논저로 〈예교의 가늠자─조선시대 경상도 지역 지리지 풍속조 연구〉, 〈조선시대 사위의례에 대한 연구〉, 《왕실의 천지제사》(공저), 《즉위식, 국왕의 탄생》(공저), 《조선의 국가의례, 오례》(공저), 《길 위의 조정》, 《숙종대왕 이순의 성인식》, 《대한제국의 전례와 대한예전》(공저) 등이 있다.
김호 (저자)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인교육대학교 사회교육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조선 의료사 연구와 더불어 조선사회의 범죄와 그에 따른 처벌 등에 관심을 갖고 통치의 제도화, 정치의 윤리 등을 고민하고 있다. 주요 논저로 〈연암 박지원의 형정론〉, 〈조선후기 흠휼의 두 가지 모색〉, 〈시골 양반 역병 분투기〉, 〈16~17세기 조선의 지방 의국 운영〉, 《허준의 동의보감 연구》, 《조선의 명의들》, 《조선왕실의 의료문화》, 《정약용, 조선의 정의를 말하다》, 《100년 전 살인사건》, 《다산학 공부》(공저) 등이 있고, 역서로 《신주무원록》, 《다산의 사서학》(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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