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BOOK도서상세

인문

역사의 공간 - 소수성, 타자성, 외부성의 사유

이진경(저자) | 휴먼인문 | 23,000원 | 2010.01.25 | 596p | ISBN : 9788958623014 | 03100

조회(3,144)

역사의 공간

표지확대

  • 독자리뷰(0)
  • 한줄서평(0)

역사를 통해 소수성, 타자성, 외부성을 사유하다
역사를 통해서 외부성과 소수성, 타자성을 사유하는 그런 공간. 나는 그 공간이 흔히 말하는 역사, 대문자 ‘역사’에 의해 지워지거나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된 것들에 눈을 돌리고 그것들을 볼 수 있는 공간이 되길 바란다. 그래서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듣고, 생각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생각하며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역사라는 이름으로 묶이는 이런저런 주제들에 반복하여 소수자나 외부성, 타자성이라는 개념을 끼워 넣고 그 안에서 작동하게 하고자 했던 시도가 읽는 이들과 함께 새로운 공동성을 생산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인터넷 서점 도서구매

  • YES24
  • 알라딘
  • 인터파크
  • 교보문고

책꽂이에 담기독자리뷰 쓰기

  • 간편메뉴
  • 오탈자 있어요
  • 전체보기
  • 도서소개
  • 저자소개
  • 목차
  • 독자리뷰

도서소개

1. 이진경! 처음으로 ‘한국의 역사’를 말하다

“《역사의 공간》이라는 책은 저를 아는 사람들이 보면 당황스러워할 것 같습니다. ‘이진경이 이런 책을 썼어?’ 하면서 말이죠. 그 동안 제가 책을 20여 권 집필했는데, 한국의 역사와 관련해서 글을 쓴 것은 《역사의 공간》이 처음입니다. 예전에 박사학위 논문을 쓸 때 ‘건축사’ 관련 글을 썼습니다. 《근대적 주거공간의 탄생》이라는 책으로도 출간되었지요. 그때 심사하던 분들이 저에게 ‘재능이 있는 친구가 한국 역사는 안 하고 남의 역사를 하고 있다.’고 한 적이 있었어요. 당시 저는 역사 공부를 한다는 생각보다는 근대성, 근대적 주체라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어떻게 살았고, 어떻게 행동해왔는가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한국의 역사에 대해 관심이 있는 분들로서는 역사 의식의 결여, 이런 것들로 읽혔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그런 점에서 보면 이번에 한국 역사, 한국에서의 역사에 대한 책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다루는 내용들이 이진경이란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얼굴로 다가가는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 무척 독특한 책이 될 것입니다.”(2010년 1월 12일 ‘역사의 공간 출간 기념 강의’에서)

80년대 맑스와 더불어서 공부하고 사유하는 삶을 살았고(《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방론》), 90년대에 푸코, 들뢰즈/가타리 등과 함께 삶과 철학을 나누며 탈주의 철학(《맑스주의와 근대성》, 《철학과 굴뚝청소부》, 《철학의 탈주》)을 사유했고, 2002년 그 탈주의 철학을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형태로 밀고나가 유목주의, 혹은 생성의 철학(《노마디즘 1,2》, 《철학의 외부》, 《미-래의 맑스주의》)을 기획하고 실천하면서 자본주의 근대성에 대한 날선 사유와 코뮨의 실험을 지속해온 지식인 이진경!
그가 이번에 ‘한국의 역사’를 횡단하며 소수성, 타자성, 외부성을 사유하는 책 《역사의 공간》을 발간하였다. 한국적인 역사, 한국에서의 역사에 관한 글을 처음으로 묶어 발간하는 이 책은 저자 자신의 주요한 개념인 ‘외부’라는 개념을 역사라는 단일한 시간 속에 집어넣어, 하나의 이야기만을 생산하는 대문자 역사 속에서 보이지 않았고, 말하지 못하는 것들을 절단 채취하여 새로운 삶의 가능성의 공간을 탐사하고 있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상이한 시기에 상이한 계기에 의해서 쓰인 것들이다. 그래서 다루는 주제나 글의 성격, 심지어 글의 길이나 스타일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르다. 진지하고 무거운 학술 논문에서 강의나 강연을 위한 원고, 그리고 정세 분석적인 글에서 칼럼 같은 글들이, 상이한 상황에서 상이한 독자나 청중을 대상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글들의 요철이 매우 큰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들을 하나의 책으로 모으게 했던 것은 일단은 모두 한국의 과거나 현재에 대한 글이라는 아주 평범한 ‘공통성’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공통성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은다는 것에 의해 만들어지는 어떤 ‘공동성’이다. 이 이질적인 글들을, 그 요철마저도 그대로 둔 채 하나로 모음으로써, 그 글들이 함께 모여서 만들어내는 어떤 공동의 것이 있을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글을 쓰거나 모으는 것 이외에 읽는 독자의 행위가 또한 함께 모이면서 만들어지는 것이기에, 읽는 방식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임이 분명하지만 말이다.
그 공동의 것이 무엇인가를 미리 정할 수는 없을 테지만, 아마도 거기에는 몇 가지 성분이 포함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역사, 시간, 정치, 소수자, 타자성, 외부성 등등이 그것일 것이다. 결국 ‘공동의 것’이란 아마도 이런 개념들로 표현되는 사유의 공간일 것이고, 그리고 그로부터 나름의 색깔을 갖고 나름의 선을 그리는 상이한 사유들이 그려지는 공간일 것이다. 역사를 통해서 외부성과 소수성, 타자성을 사유하는 그런 공간. 나는 그 공간이 흔히 말하는 역사, 대문자 ‘역사’에 의해 지워지거나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된 것들에 눈을 돌리고 그것들을 볼 수 있는 공간이 되길 바란다. 그래서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듣고, 생각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생각하며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역사라는 이름으로 묶이는 이런저런 주제들에 반복하여 소수자나 외부성, 타자성이라는 개념을 끼워 넣고 그 안에서 작동하게 하고자 했던 시도가 읽는 이들과 함께 새로운 공동성을 생산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그럼으로써 역사의 공간이 비가시적인 것이 가시화되고, 자격 없는 자들이 말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이럼으로써 역사의 공간은, 혹은 역사 자체는 비로소 정치적인 것이 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 《역사의 공간》 11~12쪽, 〈저자 서문〉에서


2. 저자 소개

이진경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했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서구의 근대적 주거공간에 관한 공간사회학적 연구〉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연구자들의 코뮤넷(코뮨들의 네트워크) ‘수유+너머’에서 〈수유너머 N〉을 새로 만들어 활동하고 있으며, 박태호라는 이름으로 서울산업대 기초교양학부 교수로 강의하고 있다.
전태일의 유령, 광주시민의 유령들과 더불어 공부하고 전투하며 80년대를 보내던 중 이진경이란 필명으로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을 썼고, 그 책이 허명을 얻은 덕분에 본명은 잃어버렸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근대성에 대한 비판적 연구를 시작해 그 첫 결과물로 《철학과 굴뚝청소부》를 발표했다. 이후 자본주의와 근대성에 대한 이중의 혁명을 꿈꾸며 쓴 책들이 《맑스주의와 근대성》,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 《수학의 몽상》, 《철학의 모험》, 《근대적 주거공간의 탄생》, 《필로시네마, 혹은 탈주에 관한 11편의 영화》 등이다. 새로운 혁명의 꿈 속에서 맑스, 푸코, 들뢰즈·가타리 등과 함께 사유하며 《노마디즘》, 《철학의 외부》, 《자본을 넘어선 자본》, 《미-래의 맑스주의》, 《외부, 사유의 정치학》 등을 썼다.


3. 역사를 통해 소수성, 타자성, 외부성을 사유하다
― 이 책의 특징 1

역사란 시간적인 구성물이다. 그것은 구성되는 지대, 구성되는 양상마다 다른 시간을 갖는다. 하나의 민족으로 묶는 역사만큼이나 그것을 분할하는 다양한 집단들의 역사, 혹은 다양한 개체들의 역사가 있다. 그 모든 집단, 그 모든 개체들마다 각자의 시간, 각자의 리듬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문자로 쓰인 ‘역사’는 언제나 이 상이한 시간들을 하나의 시간 안에 포획하거나 포섭한다. 수많은 이질적 시간들이 하나의 ‘민족’이나 ‘국가’의 시간, 하나의 ‘세계’의 시간, 하나의 역사의 시간에 의해 지워지고 보이지 않게 된다.
역사는 과거의 엄격한 사실들을 기록하는 것일까? ‘사실들을 기록한다’는 것은 이미 어떤 것을 기록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짜는 것이다. 어떤 것을 선별하느냐에 따라 이야기가 달라지기에 ‘어떻게 써야 하는가’를 두고 항상 싸움이 벌어진다. 하나의 스토리, 하나의 기억을 만들어야 하기에 이곳에서는 매번 쟁투가 벌어진다. 권력자가 바뀔 때마다 역사가 다시 쓰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저자는 이러한 대문자 역사에 대항하는 반-역사를 사유한다. 그는 ‘외부’라는 개념을 통해 역사를 다시 사유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에게 외부란 무엇인가? 외부에 의해 사유한다는 것은, 불변의 내적 본질 같은 것은 없으며, 어떤 것도 그것과 만나는 외부에 의해 그 본질이 변화함을 보는 것이다. 매우 근본적인 위상을 갖는 이 ‘외부’라는 개념은, 동시에 매우 정치적이기도 하다. 외부를 향해 열려 있음은 나와 다른 것, 이질적인 것을 긍정함을 뜻하고, 뜻밖의 것을 긍정하는 것을 뜻하며, 그런 외부와의 만남을 통해 ‘나’나 ‘우리’ 혹은 ‘조국’이라고 불리는 내부가 변화하는 것을 긍정함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역사의 공간》은 ‘외부’라는 개념을 통해서 한국 근현대사의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중요한 거점들을 연결하는 새로운 지도를 그리고 있다. 근대적인 시간 관념, 역사 관념, 진보 관념은 무엇을 통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그리고 그러한 역사, 시간, 진보 관념 속에서 만들어진 대문자 역사는 무엇을 배제해왔는지를 탐사한다. 그리하여 견고한 대문자 역사의 외부에 있는 반역사적인 돌발―이것을 사건이라 부른다―을 통해 주류적인 역사에 구멍을 내고자 하는 것이다.
역사를 통해서 소수성, 타자성, 외부성을 사유하는 이 공간이 흔히 말하는 역사, 즉 대문자 ‘역사’에 의해 지워지거나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된 것들에 눈을 돌리고 그것들을 볼 수 있는 공간이다. 그래서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듣고, 생각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생각하며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주자들을 받아들이면서도 제한된 공간 안에 가두는 방식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은, 그러한 공간적 제한을 통해 만들어지는 시간의 차이를 착취하기 위한 것이다. 시간이란 시계로 표상되는, 이미 주어져 있고 무얼 하든 동일하게 ‘흘러가는’ 자연적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공동의 리듬을 통해서, 혹은 동조된 리듬을 통해서 구성되는 것이다. 공동성이란 서로의 신체적인 움직임을 맞추어가는 리듬의 구성을, 그것을 통해 만들어지는 시간적 동조를 포함한다. 그렇기에 구성되는 리듬의 차이마다 다른 시간들이 존재한다.
맑스에 따르면 자본의 착취는 무엇보다 이런 시간의 차이를 착취하는 것이다. 화폐자본에서 상품자본, 생산자본을 거쳐 다시 화폐자본으로 돌아가는 자본의 순환은 자본의 생존의 리듬을 갖는다. 이 순환의 리듬을 맞추지 못하면 자본은 흑자상태에서도 파산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자본의 순환에 부분적으로 맞물려 있지만 이와 전혀 다른 노동력의 재생산의 리듬이 있다. 노동력을 제공하고 임금을 받아 그것으로 생활수단을 구매하여 소비하며 다시 이에 필요한 돈을 벌기 위해 노동력을 팔러 자본가에게 가야 하는 노동력의 순환이. 이 순환의 리듬을 맞추지 못하면 노동력은 재생산되지 못하고, 노동자는 죽는다. 자본의 시간과 노동력의 시간, 이 상이한 시간의 차이를 자본은 착취한다. 노동력의 순환에 필요한 노동시간의 최소치와 자본의 순환에 필요한 노동시간의 최대치의 차이를 맑스는 잉여가치라는 개념으로 정의한 바 있다. 역으로 잉여가치란 이러한 시간의 차이를 착취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역사의 공간》 14~15쪽, 〈저자 서문〉에서


4. 근대 초기 ‘한국에서의 역사’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 이 책의 특징 2

우리가 ‘역사’를 말할 때 항상 두 가지 용법으로 사용한다. 하나는 어떤 사실도 그것을 둘러싼 ‘역사적 조건’에 따라 그 의미나 효과가 달라진다고 말할 때의 역사다. ‘역사성’이라는 말로도 불리는 이 역사의 개념에서 역사는 과거 사건들의 집합으로 존재하는 어떤 것도 아니고, 어떤 사실의 의미나 가치를 항상-이미 특정한 양상으로 규정할 준비가 되어 있는 준거틀도 아니다. 그것은 어떤 하나의 사실이 특정한 의미를 갖는 사건이 되도록 만드는, 그 사실의 의미나 본성을 끊임없이 다르게 만드는 ‘외부’의 다른 이름이다. 맑스가 어떤 한 사람을 노예로 만드는 것은 그를 둘러싸고 있는 ‘특정한 관계’라고 하면서 ‘역사유물론’을 정립했을 때, 거기서 사용되는 ‘역사’라는 개념은 정확하게 이런 의미를 갖는다고 한다.
우리가 익숙하게 접하는 ‘역사’라는 말은 어떤 하나의 연속적 흐름에 통합된 지나간 사실들의 집합을 말한다. 그것은 현재에 부단히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에 미래적인 방향을 부여한다고 믿어지는 사실들의 연속체를 의미한다. 그래서 그것은 누구도 자의적으로 바꿀 수 없는, 저기 따로 존재하는 것으로, ‘실증성’을 갖는 사실들의 집합으로 다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들은 대개 어떤 위대한 기원에서 시작하여 고난과 파란을 거치면서 결국은 다시 어떤 위대한 미래로, 위대한 종착점으로 향해 가는 하나의 서사로 구성된다.
우리는 ‘지나간 사실들의 집합’이라는 역사 관념에 너무 익숙하지만, 사실 역사란 다양한 사실들, 사건들을 연결하여 만들어지는 하나의 이야기(histoire), 하나의 서사(narrative)다. 역사는 사실들의 서사적 구성물이고, 따라서 그것은 실재적 사실들로 만들어지지만 그저 실재적인 것만은 아니고, 구성적이지만 그저 허구적인 구성물만은 아니다. 역사는 실재와 허구 사이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가 ‘하나’라는, ‘보편적’이라는 관념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역사가 발전한다는 관념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근대 초기 한국에서는 이러한 역사, 역사 관념이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을까?
저자는 〈대한매일신보〉(1904~1910년), 〈독립신문〉(1896~1899년), 〈황성신문〉(1889~1904년)의 논설, 잡보 등의 자료를 섭렵하여, 근대 초기 한국에서의 근대적 시간-기계의 작동 양상, 영토적 공간 개념의 탄생, 역사적 시간 개념의 탄생, 근대 초기 역사 관련 개념들의 인접성과 비대칭성 등에 대하여 치밀하고 흥미로운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

……좋고 우수하다는 생각의 계몽이나 확산이 그것을 실제로 사용하게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근대적인 시간성의 영역과 만나고 그것을 자신들의 삶의 조건으로, 일상생활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일까?
이에 대한 우리의 가설적인 대답은 신문이 거기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물론 학교나 교회가 그러한 역할을 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근대적인 시간관을 갖는다는 것, 혹은 근대적인 시간을 일상생활에서 수용한다는 것은 단지 양력에 따라 날짜를 매기고 시간을 지키는 훈련을 한다는 것 이상의 좀 더 근본적인 사고방식의 변환을 요구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하나의 시간을 다양하고 이질적인 사건이나 영역들에 대해 단일한 기준 내지 척도로 적용하는 능력과 사고방식, 혹은 태도와 습속을 요구한다. 이를 통해 이질적인 삶의 요소들을 하나의 시간적인 좌표계 안에서 통일하고 통합하여 파악하는 능력이 획득된다. 그것이 없다면, 양력은 달력을 볼 때나 날짜 계산하는 데 사용되곤 그만일 것이고, 시계는 학교나 교회 등의 매우 제한된 영역에서 사용되곤 그만일 것이다. 그러한 국지적 사용으론 근대의 시간적 생활방식은 물론 근대적 시간관 또한 실질적으로 습득하여 사용한다고 말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근대적 시간관을 형성하는 데서 정작 중요한 것은 달력을 보지 않을 때도, 시간 약속을 하거나 지키지 않을 때도, 하나의 단일한 시간적 좌표계 안에서 다양한 사건들을 포착하고 배열하며 관련짓는 것이고, 그러한 관련에 따라 개개의 사건이나 사실이라는 부분을 전체적인 시간의 ‘흐름’ 속에 통합하여 사고하고 행동하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문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것이 새로운 시간관이나 시간 개념을 계몽하고 그것의 사용을 적극 주장했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그러한 생각에 적극 동조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런 종류의 시간관을 사용하고 다양한 사건을 하나의 시간적 좌표계 안에 통합하여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다고는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치 수학이 중요하며 그것을 잘해야 한다고 적극 동조한다고 해서 수학을 실제로 잘하는 것은 아닌 것처럼. 반면 그런 생각을 명시적으로 하지 않아도, 실제 수와 계산이 지배하는 세계 속에서 사는 사람은 수학을 실질적으로 이용하는 데 근접하게 된다. 신문이 근대적 시간관을 습득하여 사용하는 실제적인, 그리고 핵심적인 조건이 되었다는 것은, 무엇보다 우선 그것이 근대적인 시간성이 작동하는 실질적인 장(場)을 형성했다는 이유 때문이다.
― 《역사의 공간》 187~188쪽, 5장 〈근대적 시간은 어떻게 ‘선험적 시간’이 되었나?〉


5. 역사, 진보의 미래를 다시 사유하다
― 이 책의 특징 3

현재를 과거의 누적으로서 설명하고, 그러한 변화의 연속 속에서 미래를 정의하는 것, 그리고 그러한 누적의 과정을 ‘진보’라는 원리에 의해 정의하는 것, 그것이 19세기에 완성되어 이후 지배적인 것이 된 역사와 진보 개념이다. 이것들이 결합되면서 역사는 자신의 내적인 발전 논리를 갖고 그 자체로 존립하는 실체가 된다. 이러한 진보의 개념은 단지 지나간 역사를 추스르고 통합하는 것만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의 사태, 아니 아직 오지 않은 사건조차 자신의 거대한 역사 안에 통합한다. 다양한 과거들에 하나의 방향을 부여함으로써 얻어진 궁극적 지점은 목적론적 원인이 되어 현재를 추동하며, 나아가 현재 시제의 역사적 벡터들이 갖는 다양한 방향들에 대해 평가의 척도로 작용하는 초월적 기준이 된다. 그 기준에 따라 우리는 하나의 사건이나 시도들에 대해 진보적·반동적이라는 이항적 절단기를 작동시킨다. 이런 점에서 이 거시적 진보의 개념은 목적론적일 뿐 아니라 초월적인 위상을 갖는다. 이와 다른 진보의 개념은 불가능한가? 저자는 미시적 진보, 미분적 개념으로서의 진보를 제안한다.

우리는 적분적 진보의 개념과 대비되는 미분적 진보의 개념이, 거시적 진보의 개념에 반하는 미시적 진보의 개념이 있을 수 있음을 상정할 수 있지 않을까? 연속성에 반하는 불연속적 진보의 개념이, 하나의 척도로 모든 것을 동질화하는 진보와 달리 이질적 성분들의 만남을 포착하며 사건을 구성하는 이질적 진보의 개념이, 하나의 초월적 기준을 통해 포착되고 평가되는 진보와 달리 내재적 관계에 의해 포착되고 평가되는 내재적 진보의 개념이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적분적인 진보의 개념이 시간의 누적을 통해 변화를 하나의 결과로 통합하는 것과 달리, 미분적 진보의 개념은 주어진 조건 속에서, 그 조건을 밀고 가는 관성적인 벡터와 다른 이탈의 벡터를 가동시킴으로써 그 조건을 변혁하려는 성분에 의해 정의될 수 있다. 그 조건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잠재적 포텐셜(potential)을 포착하여 새로운 방향적 성분으로 변환시키거나, 아니면 다가오는 잠재적 사태와 현재의 사태를 잇는 새로운 계열화의 선을 현재를, 혹은 과거조차 변환시키는 것이다. 진보란 주어진 조건의 관성적 지속에 의해 이루어지는, 이미 처음부터 내장된 것이 펼쳐지는 ‘전개/발전(Entwicklung)’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것을 유지하는 말 그대로 ‘보수적’ 성분에 반하여 전복 가능성을 실험하는 변환의 벡터에 의해 가능하리라는 것이다(비록 ‘충분조건’은 아니라고 해도, 그것 없이는 진보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이미 존재하는 관성적 벡터를 밀고 가는 것과, 거기서 이탈하는 포텐셜을 가동하는 것의 차이를 안다면, 이 두 가지 진보의 개념은 상반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 《역사의 공간》 121~122쪽, 3장 〈‘진보’ 개념의 미래〉에서


6. 새로운 삶의 가능성, 소수적인 역사는 어떻게 가능한가?
― 《역사의 공간》 출간의 의의

대문자 역사의 직선을 뚫고 나오는 돌발적인 사건들은 항상 있다. 그것은 안정적인 역사의 지반을 흔들며 출현하고,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는 대문자 역사의 얼굴에 피를 튀기며 나타난다. 이런 돌발적 사건들은 당시의 역사로선 매끄럽게 싸안을 수도 없고 적당하게 한 자리를 주어 잠재울 수 없는 것으로서 역사 안에 출현한다. 이런 점에서 그것은 역사가 쉽사리 봉합할 수 없는 균열의 지점이 된다. 그래서 대부분 배제하거나 지워버려서 소리 나지 않게 하려고 하지만, 그로 인해 지워진 소리가 끊이지 않고 발생하는 진원지가 된다. 즉 그것은 역사가 담을 수 없는 사건이지만 그렇다고 지워버릴 수도 없는 사건이란 의미에서 ‘역사적 이성’의 무능력의 지대를 형성한다. 그것은 역사화할 수 없는 사건이다. 저자는 이를 ‘반역사적 돌발’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돌발은 우리 역사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의 역사에서도 흔히 있는 사건이었으나, 우리의 눈에는 보여지지 않거나 들리지 않을 뿐이다. 전태일, 광주항쟁, 이주노동자, ‘재일조선인’의 역사, 식민지 민족의 역사, 여성들의 역사, 그리고 흑인들의 역사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역사를 소수자, 혹은 소수성 역사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소수적인 역사는 것은 언제나 대문자 역사와 대결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광주항쟁이 역사와 대결하는 방식은 역사를 쓰는 것보다는 거리에서 이루어졌다. 사파티스타의 경우 지워진 역사에 대해서, 그 망각에 저항하는 방식은 총을 들고 봉기하는 방식이었다. 그런 점에서 역사와 대결하는 일종의 대항 역사를 쓴다고 하는 것, 이것은 그냥 글을 쓰는 작업하고는 다른 것이다. 글을 쓰기 이전에 실질적인 행동, 실천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후에 기록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전태일이 분신을 하거나 광주에서 사건이 나거나 그런 것들이 사건이죠. 소수적인 돌발. 돌발적인 사건이에요. 돌발적인 이유는 역사에서 담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돌발인 것입니다. 아주 불편한 돌발, 이런 것으로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역사에 담을 수 없는 사건이고, 역사의 외부를 이루는 것입니다. 외부라는 것을 통해서 역사를 흔들어버리는, 이런 의미에서 굉장히 역설적인 의미의 역사. 진보적인 역사는 그런 것들이어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역사는 대문자의 역사와 이런 소수적인 돌발의 역사가 대결하는 장(場)입니다. ‘역사의 공간’이라는 제목을 붙였을 때 역사라고 하는 것이 대문자의 역사 안에 자리 잡고 의미를 부여하는 역사는 아니었습니다. 이미 부여된 어떤 의미들, 기록되어 있는 것들과 대결하는 장, 그런 점에서 다른 역사를 구성하게 만드는 대결의 공간이 되게 하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과 관련해서 제가 타자의 입장에서 서야 한다는 것, 소수자의 입장에서 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010년 1월 12일 ‘역사의 공간 출간 기념 강의’에서)

이주의 시대, 동아시아만이 아니라 인도, 방글라데시, 네팔, 스리랑카에서 버마, 필리핀에 이르는 광범한 지역으로부터 시작된 이주자들의 흐름이 아시아 전체를, 혹은 세계 전체를 횡단하는 시대에, 자국을 떠나고 자국의 동일성/정체성을 버리며 이질적인 새로운 상대와 만나고 섞이며 살아가려는 사람들의 이 거대한 흐름에서 ‘왜구’라고 명명했던 어떤 특이성을 볼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렇다면 타니가와가 큐슈를 통해, 모리사키가 왜구를 통해 사유하고자 했던 것, 다시 쓰고자 했던 역사를 우리는 이 새로운 이주의 흐름을 통해 다시 사유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미 우리가 사는 세계 전체를 적시고 있는 이주자들을 통해 다시 쓸 수 있을 것 같다. 그럼으로써 이 이주자들을 불러들일 수밖에 없으면서도 끊임없이 제한하고 분리하고 비가시화하려는 힘에 대항하며, 역사를 치안이나 착취 아닌 정치가 가동되는 영역으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그 동안 꽤나 오래 반복되어 왔던 ‘동아시아’라는 상투화된 주제가 국가적 사유를 넘어 정치적으로 사유될 수 있다면, 바로 이런 방식을 통해서가 아닐까? 국경을 넘는 이주의 흐름이 범람하는 시기에 필요한 새로운 국제주의란 이런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여기 실린 글들을 하나의 책으로 모으면서 이러한 몽상을 했다. 이런 몽상 속에서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찾고 싶다. 이 몽상을 통해 “이주자들을 착취하는 개 같은 나라”에서 계속 살아갈 방법을 찾고 싶다. 그리하여 외부자, 소수자, 타자들이 우리의 삶에 끼어들 균열과 여백이 만들어지길, 그것을 통해 그들과 더불어 새로운 공동의 삶, 새로운 공동의 시간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되길, 그리하여 그들과 함께 우리의 삶이 변하게 되길 진심으로 소망한다.
― 《역사의 공간》 21~22쪽, 〈저자 서문〉에서

저자소개

이진경 (저자)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했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서구의 근대적 주거공간에 대한 공간사회학적 연구〉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노마디스트 수유너머 N에서 활동하며, 박태호라는 이름으로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기초교육학부에서 강의하고 있다. 1980년대를 보내면서 이진경이라는 이름으로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을 썼고, 그 책이 허명을 얻은 덕분에 본명은 잃어 버렸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근대성에 대한 비판적 연구를 시작해 그 첫 결과물로 《철학과 굴뚝청소부》를 발표했다. 이후 자본주의와 근대성에 대한 이중의 혁명을 꿈꾸며 《맑스주의와 근대성》,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 《수학의 몽상》, 《필로시네마, 혹은 탈주에 관한 11편의 영화》 등을 썼고, 사회주의 붕괴 이후 혁명의 꿈속에서 푸코, 들뢰즈 · 가타리 등과 사유하며 《노마디즘》, 《철학의 외부》, 《역사의 공간》,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 《뻔뻔한 시대, 한 줌의 정치》, 《대중과 흐름》 등을 썼다.

목차

목차 전체보기

독자리뷰0

독자리뷰 쓰기모두보기

한줄서평0

현재 /1000byte 글자수 500자 까지 작성 가능하며 욕설과 비방글은 삭제됩니다.

목록으로 돌아가기상단으로

독자적인 책수다 팟캐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