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BOOK도서상세

역사

역사학의 세기 - 20세기 한국과 일본의 역사학

도면회,윤해동(엮음) 비판과 연대를 위한 동아시아 역(기획) | 휴먼역사 | 28,000원 | 2009.06.01 | 556p | ISBN : 9788958622819 | 93900

조회(1,910)

역사학의 세기

표지확대

  • 독자리뷰(0)
  • 한줄서평(0)

한국과 일본의 20세기는 근대역사학을 적극 창출하고 서술해온 시기로, 그야말로 ‘역사학의 세기’였다. 유럽의 근대역사학을 가장 먼저 받아들인 일본, 이를 재차 수용하면서도 식민사관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한국, 이 두 나라 역사학의 지난 100년간을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인터넷 서점 도서구매

  • YES24
  • 알라딘
  • 인터파크
  • 교보문고

책꽂이에 담기독자리뷰 쓰기

  • 간편메뉴
  • 보도자료
  • 오탈자 있어요
  • 전체보기
  • 도서소개
  • 저자소개
  • 목차
  • 독자리뷰

도서소개

1. 한국과 일본의 역사학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 이 책의 개요

이 책은 근대역사학이 성립한 20세기 한국과 일본의 역사학을 전면적으로 다루고 있다. 근대국가 성립과 더불어 적극적으로 서술되기 시작한 일본의 근대역사학을 시작으로, 식민지 조선으로 이어진 이식과 형성과정, 그리고 1945년 이후 두 나라에서 역사학의 발전과정과 특징, 전망을 비판적으로 고찰한 12편의 논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글은 지난 2004~2005년 사이 ‘비판과 연대를 위한 동아시아 역사포럼’에서 주최한 세 차례 워크숍의 성과를 담은 것이다. 당시 워크숍의 주제는 <동아시아에 있어서 역사학의 위상>으로, 여기서는 한국과 일본의 근대역사학의 존재형태에 대한 물음과 문제점을 주로 다루었다.

동아시아, 그 중에서도 일본과 한국의 근대역사학의 특징 중 하나는 ‘국사-동양사-서양사’라는 3분과 체제의 존재형태라 하겠다. 역사 3분과 체제가 한국과 일본에 각각 성립하게 된 역사적 배경에는 국민국가 형성 시기 역사에 부여된 국가적 과제와도 연관되어 있다. 이 책은 국사-동양사-서양사라는 3분과 체제가 일본에 이어 한국에 성립하게 된 배경과 문제점을 이와 연동해 살펴봄으로써, 20세기 한국과 일본의 역사학을 비판적으로 고찰하였다.

1부에서는 동아시아에 근대역사학을 서구유럽으로부터 가장 먼저 수용한 일본에서 역사학이 천황 중심국가를 구성하고 대외적으로 침략하는 데 봉사하면서 성립했음을 검토하였다. 특히 일본에서의 근대역사학의 수용과정은 곧 유럽의 내셔널히스토리를 수용하면서 그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을 중국과 한국에 다시금 적용하는 과정임을 밝혔다(일본에서 랑케의 실증주의 세계사가 일본식으로 전유된 과정을 살펴본 고야마의 글과 동양 개념의 일본적 형성을 비판적으로 살펴본 미쓰이 논문 참조). 한국에서도 청일전쟁과 갑오개혁을 계기로 일본의 근대 역사학을 수용하면서 국사를 구성하는 과정을 살폈으며(도면회), 일제강점 이후 식민지 근대적으로 재편되는 상황, 그 중에서도 경성제국대학 내에 동양사학의 존재방식을 구명함으로써 해방 직후 한국 동양사학계의 출발 지점을 돌아보게 한 글이 실렸다(박광현).

2부에는 해방 후 한국에서 근대화를 위해 일제 식민주의 사학을 비판하고 극복하는 노력이 진행되었지만, 그 노력이 여전히 유럽과 일본이 만들어놓은 근대역사학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공전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 윤해동, 김기봉, 육영수의 논문(특히 이 세 논문은 20세기 한국의 역사학을 이끌어온 역사학자 김용섭, 이기백, 민석홍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다), 더불어 일본에서 재일조선인 연구가 ‘당사자 연구’로서 발전되어온 과정을 고찰한 논문(도노무라)이 함께 실려 있다.

3부에서는 패전 후 일본에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이 이전의 황국사관을 비판하면서 역사학계를 주도하는 ‘전후역사학’으로 성립했으나 그들 역시 주변국가와 민족에 대한 가해의 기억을 망각하고 자국 중심의 역사상을 일방적으로 만들어왔음을 살펴본 네 편의 논문(도베, 다나카, 이와사키, 이성시)을 만날 수 있다.

이 책에 실린 개별 논문의 문제의식은 파편화되어 있는 듯하지만, 이 책의 엮은이들은 이들 논문을 통해 지금 우리는 20세기 근대역사학의 한계를 벗어났는가, 벗어났다면 어떤 측면에서 어느 만큼인지를 질문하고 있으며, 이 질문을 통해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좌표를 재확인하게 한다. 특히 역사 3분과 체제가 유럽중심주의와 오리엔탈리즘에 인식론적 기반을 두고 있는 점을 지적하면서, 이후 한국역사학은 어디로 향해야 할 것인지를 진지하게 질문하고 있다.

근대역사학은 유럽에서 수용되었다. 그 역사학은 문명/야만, 발전/정체, 남성/여성이라는 이분법적 세계관에 입각해 있었고, 이러한 구도는 지난 100년간 한·중·일 삼국의 근대역사학에도 고스란히 계승되었다. 그러나 차이를 차별로 바꾸는 근대역사학의 틀 속에 갇혀 있는 한 우리는 국가·민족 간 갈등이 없는 평화로운 세계를 기대할 수 없다. 이 책의 기획 의도는 여기에 있었다. 일본 역사교과서 논쟁을 계기로 시작한 동아시아 역사포럼 5년 작업 중 마지막 2년간은 동아시아 삼국에서 근대역사학의 존재형태를 검토했다. 이 책은 서유럽의 근대역사학을 수용한 일본, 이를 재차 수용하면서도 일본의 식민사관을 벗어나고자 했던 한국의 지난 100년간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자 했다. 과연 지난 100년간 일본과 한국의 역사학은 성립기 근대역사학의 틀에서 벗어났는가? 벗어났다면 어떤 측면에서, 어느 만큼인가?

24~25쪽, 총론 <한국과 일본의 20세기 역사학을 돌아보며> 중에서

 

 

2. 지금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기 획의 출발, 그리고 결실의 과정을 돌아보다

이 책은 ‘비판과 연대를 위한 동아시아 역사포럼(이하 역사포럼)’에서 2004~2005년 동안 세 차례 진행한 워크숍의 결과로 탄생하였다.

역사포럼은 2000년 겨울 일본의 역사교과서 파동에 대해 문제의식을 지닌 한국과 일본의 역사학자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만들었다. 모임은 ‘성찰적 동아시아 역사상’을 구축하기 위해 ‘밑으로부터 자발적인 방식으로 동아시아의 시민적 연대망을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했으며, 이에 공명한 한일 양국의 연구자들은 2001년 가을 첫 워크숍을 시작으로 2005년 8차 워크숍까지 다양한 논의 주제를 통해 한국과 일본 역사학자의 교류의 장을 만들어나갔다.

첫 워크숍 <한일 역사교과서의 상호비판>(2001)의 결과물은 《기억과 역사의 투쟁》(삼인, 2002)으로 묶였으며, 2·3차 <식민지주의와 근대>(2003)는 《국사의 신화를 넘어서》(휴머니스트, 2004 ; 《植民地近代の時座》, 岩波書店, 2004)로 묶여 출간되었다. 이후 <동아시아라는 시공간>(4·5차, 2003), <동아시아에 있어서 역사학의 위상>(6·7·8차, 2004~2005) 등의 주제로 워크숍이 진행되었다.

특히 마지막 세 번의 워크숍은 현재 역사학의 좌표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 워크숍은, 한일 양국의 국사는 동양사와 서양사를 포함한 3분과 체제를 바탕으로 편성된 것이며, 그로 인한 문제점을 선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자못 크다. 이 책 《역사학의 세기》는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을 담아낸 것이다. 즉, 한국과 일본 근대역사학이 3분과 체제에서 비롯되었으며, 그로 인해 노정된 문제들을 비판적으로 고찰함으로써, ‘지금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라는 물음에 답을 하고 있다. 엮은이들은, 워크숍과 편집과정을 거치면서 한일 양국의 근대역사학에는 수많은 차이와 균열이 존재함을 확인하였으며, 그러한 차이와 균열을 고스란히 이 책에 담고자 하였다. 따라서 이 책을 통해 국사-동양사-서양사라는 분화를 바탕으로, 민족주의-제국주의를 둘러싼 균열을 비롯해 실증주의에 대한 각기 다양한 해석을 덧붙임을 확인할 수 있다.

2004년 출간된 《국사의 신화를 넘어서》가 ‘국사의 연쇄’라는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면, 이 책은 국사의 연쇄란 바로 ‘차이의 무한한 발생’임을 확인하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은 앞선 책에서 지닌 문제의식에 대한 답을 포함하고 있다고 하겠다.

워크숍과 편집작업을 거치면서 한·일 양국의 근대역사학에는 수많은 차이 혹은 균열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국사-동양사-서양사라는 분화를 바탕으로, 민족주의-제국주의를 둘러싼 균열, 실증주의 해석을 둘러싼 차이가 존재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다. 여기에 국사 성립을 둘러싼 해석의 차이, 중심과 주변, 다수자와 소수자, 남성과 여성 등등을 둘러싼 차이의 체계가 바로 근대역사학이라고 할 수 있다. 《국사의 신화를 넘어서》라는 전작의 문제의식의 일각을 ‘국사의 연쇄(連鎖)’가 차지하고 있었다면, 여기서는 국사의 연쇄란 바로 차이의 무한한 발생이라는 점, 연대를 말한다는 것은 차이를 말한다는 것을 확인하고자 한다. 이에 이번 작업의 성과는 전작 《국사의 신화를 넘어서》에 대한 답변의 의미도 있다는 점을 밝혀두고자 한다.

― 12~13쪽, <엮은이의 글> 중에서

 

 

3. 왜 ‘역사학의 세기’인가?

― 이 책의 특징 1

근대역사학은 근대 국민국가 형성시 주민을 ‘국민’으로 호명하기 위해 필요했다. 따라서 근대역사학은 국민(또는 민족)이 고대에서 당대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단일한 흐름으로 내려와 지금의 모습을 형성했음을 과학적으로 서술해야만 했다. 동아시아에서 근대역사학은 가장 먼저 산업혁명과 국민국가를 성취한 일본에서 시작되었다. 유럽에서 근대역사학의 모델을 수용한 일본은 제국주의 국가 대열에 동참하고, 이후 이를 수용한 한국과 중국은 식민지와 반식민지라는 서로 다른 역사 행로를 겪지만, 이들 삼국의 근대역사학은 모두 보통 교육과 대중매체를 통한 국가 정통성 수립, 법적으로 균등한 국민 창출, 그 국민을 동원하고자 한 점에서는 모두 동일하다.

이어 1945년 일본의 패전, 한국의 해방, 중국의 공산주의정권 수립 등 세 나라가 각기 다른 역사를 경험하지만 각각 패전과 식민지 구조의 존속, 국공내전의 상처를 근대역사학이 구현한 바로 그 ‘단일한 국사’를 통해 치유하고 회복하고자 했다. 또한 1990년대 중반 이후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중국의 동북공정, 그리고 최근 한국의 근현대사 교과서를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는데, 이들 모두 근대역사학에 시발점을 둔 국민 동원의 기능과 자국 중심의 역사관에서 비롯되었다.

이처럼 동아시아 삼국은 20세기 내내 ‘역사’를 ‘편찬’함으로써, 이를 자국민을 동원해 침략전쟁에 나서기 위한 논리, 또는 침략과 이민족의 지배에 저항하는 논리로 삼아왔다. 이렇게 볼 때 지난 20세기는 동아시아 삼국에게 가히 ‘역사학의 세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은 동아시아의 20세기를 ‘역사학의 세기’라 명명함으로써, 한국과 일본의 20세기 역사학이 만들어진 과정에 관심을 집중하였으며, 두 나라에서 이 시기 근대역사학이 어떻게 적극적으로 서술되고 편찬되었으며, 지배논리로써 복무했는지를 세밀히 들여다보았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을 둘러싼 한·일 간의 외교분쟁, 중국의 동북공정을 둘러싼 한·중 간의 외교분쟁이 한·중·일 삼국 국민의 감정을 뜨겁게 달구어왔다. 그뿐인가, 한국에서도 일본과 유사하게 고등학교 근현대사 교과서를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이 전개되었다. 이 모든 사태는 근대역사학이 갖고 있는 자국 중심의 역사관, 국민 동원 가능에서 비롯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동아시아 삼국의 20세기는 가히 ‘역사학의 세기’라고 부를 만하다.

― 24쪽, 총론 <한국과 일본의 20세기 역사학을 돌아보며> 중에서

 

 

4. 유럽중심주의와 국사 중심 체제를 넘어선 역사학을 향하여

― 이 책의 특징 2

이 책의 엮은이들은 국사-동양사-서양사 3분과 체제의 형성과정에 대한 비판적 접근을 통해 이 체제가 한국과 일본에서만 형성된 특수한 역사학이며, 이의 성립 배경에는 유럽 모델의 일본식 전유가 자리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즉 일본 근대역사학은 일본이 자신을 특수한 동양으로 설정함으로써 다른 동아시아 지역에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으며, 또 서양에 대비되는 ‘동양’ ‘동아시아’라는 개념을 적극적으로 만들어내었다고 보았다. 한국의 역사학은 이러한 일본의 역사학에 저항하면서 식민지 역사학을 극복하려 하지만 역사 3분과 체제의 틀 안에서 어쩔 수 없이 일본의 근대역사학을 닮아가고 있다고 진단하고 있다. 이들은 한국 역사학에 나타난 역사 3분과 체제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첫째, 일본이 서유럽의 오리엔탈리즘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만든 서양사와 동양사라는 개념에 대해, 한국 역사학계의 진지한 성찰이 부족하다. 둘째, 일본이 제기한 ‘동아시아’ 개념에 대한 비판적 성찰 또한 부족하다. 셋째, 역사 3분과 체제 안에서는 재일조선인의 역사처럼 국가 단위를 벗어난 역사연구는 소홀할 수밖에 없다.

이 책은, 역사 3분과 체제는 유럽중심주의와 오리엔탈리즘, 덧붙여 서양과 대등한 ‘특수 동양’ 일본이 전제된 역사학 제도라는 점을 지적하고, 이러한 체제가 국가 만들기에 복무되어왔음을 다시금 일깨워줌으로써 20세기 역사학에 대한 진지한 성찰로 이끌고 있다.

역사 3분과 체제는 서양 역사가 보편적 발전과정이라는 유럽중심주의와 비서구 역사는 후진/정체되었다는 오리엔탈리즘을 인식론적 기반에 두고, 일본이라는 특수 동양만은 예외적으로 서구와 대등한 발전을 이루었다는 발상에서 구성되어 20세기를 지배해온 역사학 제도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그렇다면 한국의 역사 연구자들은 오늘날에도 이러한 발상을 계속 수용할 것인가? 21세기에 새로운 사학사가 시작된다면 이러한 문제의식에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 50쪽, 총론 <한국과 일본의 20세기 역사학을 돌아보며> 중에서

 

 

5. 국사­동양사­서양사 3분과 체제는 어떻게 성립되었나?

― 이 책의 주요 내용 1

그렇다면 국사-동양사-서양사 3분과 체제의 성립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이 책의 각각의 논문의 주요 내용을 통해 살펴보자.

통 치와 침략의 도구로서의 일본 근대역사학

고야마 사토시(小山哲)의 연구는 리스를 통해 수용된 랑케의 역사학이 일본 근대역사학에 미친 영향을 논하고 있다. 대개 랑케의 역사학은 역사 발전의 법칙성을 해명하기보다는 각 시대의 개성을 기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역사학이며, 문헌 사료를 중시하고 이의 고증과 동시대 사료의 비판적 검토를 강조해온 역사학으로 알려져왔다. 그러나 랑케 역사학은 실증사학의 측면뿐 아니라 세계사라는 개념 틀이 따로 존재했는데, 전자가 주로 일본사와 동양사 연구에 기여했다면, 후자는 일본의 서양사와 역사철학에 영향을 미쳐, 일본의 한국 식민지 지배와 제2차 세계대전 참여를 이론적?도덕적으로 정당화하는 데 기여했다. 리스의 제자 사카구치 다카시(坂口?)는 당시 폴란드 분할 멸망과 독일의 지배과정을 ‘실증적’으로 분석했는데, 이때의 논리는 한국사를 일본 식민주의 입장에서 편찬하려고 할 때의 논리와 매우 흡사하다. 사카구치의 제자 스즈키 시게타카(鈴木成高)는 일본의 개국과 근대화, 천황제에 봉사하는 국민도덕,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의 정당성, 아시아에서 일본의 지도적 지위 등에 대해 이것이 필연적 결과임을 설명하는 데 랑케가 고안한 ‘도덕적 에네르기’ 개념을 활용했다. 고야마는 이것이 바로 랑케 역사학의 세계사 개념을 전유한 일본 서양사학의 존재형태였음을 논증하였다.

미쓰이 다카시(三ツ井崇)는 일본 동양사학의 창설자로 불리는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를 통해 동양사학의 형성과정을 검토했다. 시라토리는 초기 일본에서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인종적 동조론을 주장했으나 1909년 후반부터 ‘국민성’의 차이를 통해 중국?조선과 일본의 차이를 설명함으로써 일본을 서양에 준하는 ‘특수 동양’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는 당시 일본문화를 동양문화와 지나문화의 연장선에서 파악한 나이토 고난內藤湖南)과 대조적인데, 미쓰이는 이 둘의 비교를 통해 당시 일본의 동양사학이 일본의 정체성을 어떻게 자리매김할지 몰라 방황하고 있었으며, 이것이 ‘동양’에 실재하는 여러 인간집단의 주체성을 제외하는 ‘인간 부재의 역사학’을 만들어냈다고 비판하고 있다.

일본 서양사 연구에서 심각한 문제는 서양사학이라는 학문 영역의 성립이 ‘국사’의 성립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고 동아시아에서 근대역사학의 형성사와 깊이 관련되었다는 점, 또 서양사 연구자의 지식이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이용되었고 제국의 팽창을 정당화하기 위해 동원된 과거가 있다는 점이 연구자 사이에서 충분히 인식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 글에서 다룬 랑케사학의 ‘전유’는 일본의 서양사학과 동아시아 근대사 사이에 존재하는 여러 가지 문제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의 역사연구를 내셔널한 이야기(내러티브)의 질곡으로부터 해방하여, 동아시아의 연구자와 함께 논의하는 장을 확대하기 위해서라도, 서양사학의 학문적 재검토가 앞으로 더 다각적으로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 128~129쪽, 고야마 사토시, <‘세계사’의 일본적 전유> 중에서

시라토리와 나이토를 비교할 때 드러나는 것은,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에 대한 인식의 차이는 물론이고, 일본을 ‘동양’ 가운데 어떻게 자리매김하는가에 대한 인식의 차이였다. 이것은 곧바로 일본의 ‘동양사학’이 ‘일본’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어떻게 자리매김할지 몰라 방황하고 있었던 것을 의미하며, 그러므로 ‘동양’관은 그 자리매김 여하에 따라 좌우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동양’이라는 ‘지리’의 확정작업이 이러한 상태인 와중에, 가장 중요한 ‘동양’에 존재하는 여러 인간집단의 주체성은 고찰 대상에서 제외되어버린 것이다. 이는 확실히 근대 일본 동양사학의 한 단면이었으며, “인간 부재의 역사학”은 이렇게 하여 탄생했는지도 모르겠다.

― 173~174쪽, 미쓰이 다카시, <일본의 동양사학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중에서

저 항과 모방 사이의 한국 근대역사학

20세기 초 한국에서는 제도로서의 역사학이 온전히 성립하지 않았기 때문에 개인 저작 중심으로 근대역사학의 성립을 논하였다. 도면회는 한국의 근대역사학이 갑오개혁기에 창출되어 1905년 말 을사늑약 체결 이후 신사체(新史體)로 보편화되었으며, 현채와 신채호를 통해 두 가지 통사체계가 형성되었다고 보았다(<국사는 어떻게 구성되었는가?>). 즉, 갑오개혁 이후 1905년까지 초·중등 교과서로 사용된 역사서는 역사를 경학에서 분리해 독자적 교과목으로 만들고 자국사 교육을 강조했는데, 을사늑약 이후에는 서유럽 근대역사학의 서술체계인 신사체가 보편화되었다. 신사체는 하야시 다이스케(林泰輔)의 《조선사》를 한국의 관점에서 번안한 현채를 통해 보편화되었으며, 단군조선→기자조선→삼한→삼국→통일신라→태봉 ·후백제→발해→고려→조선으로 구성된 현채의 《동국사략》은 이후 통감부기 역사교과서 편찬의 전범이 되었다고 논증하였다. 또한 동일시기 신채호는 ‘부여주족설’을 주장하면서 단군조선→부여→고구려→발해로 이어지는 통사체계를 형성했다. 도면회는 이 시기에 와서야 역사를 왕조의 교체가 아니라 국가·국민 또는 민족의 단일한 흐름으로 서술하여 국민 동원의 기제로 사용하는 방식이 만들어졌다고 주장한다.

박광현은 경성제국대학 내에 동양사학의 존재형태를 구명하였다(<식민지 조선에서 동양사학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그에 따르면 1910년대 초까지도 일본 학계는 조선사를 국사(일본사)에 넣을지 동양사에 넣을지 확정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후 경성제대에 조선사학 강좌가 설치되면서 독립되지만 그 위상은 ‘국사(일본사)’와 지나사, 또는 ‘국사(일본사)’와 만선사의 관계사를 밝히는 역할로 보았다. 당시 경성제대 조선인 학생 중에는 국사(일본사) 전공자가 한 명도 없었고 조선사와 동양사 전공자가 각각 반씩 차지하고 있었다. 박광현은 조선인 학생의 동양사학 선택은 국사=일본사의 폭력적 자장에서 자유롭지 못한 현실에서 동양사와 조선사 사이의 차이와 동질성을 발견함으로써 민족사를 결정하려는 방법을 선택한 것으로 해석하며, 당시 동양사학은 국사학이라는 권력과 ‘잠재적 국사학=조선사학’이라는 상상 사이의 중간 지점에 있다고 보았다.

한국의 20세기 초 근대역사학은 일본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나고자 했으나 결국 일본의 근대역사학의 자장 안에 포진되어 있었으며, 이의 영향을 결정적으로 받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해방 이후 제도로서의 한국 역사학계는 일본과 마찬가지로 국사·동양사·서양사라는 3분과 체제를 갖춘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구조를 취함으로써 일본과 유사한 문제점을 낳고 있다. 또 해방 이후 일본의 식민사관을 비판하고 극복한다고 하면서도 일본이 식민지배를 위해 축적한 한국에 대한 지적 성과들을 자신도 모르게 수용하게 하는 발판으로 작용했다.

1906년 이후에는 하야시 다이스케의 통사체계를 한국의 입장에서 변용한 현채의 《동국사략》이 역사교과서서술의 전범이 되었다. 즉, 마한을 중시하는 통사체계가 부분적으로만 남아 있을 뿐, 대부분 단군조선·기자조선부터 조선왕조에 이르기까지 각 정치체나 왕조가 존속했던 시기순으로 서술하고 있다. …… 현채의 《동국사략》을 한국인이 근대역사학 방법론에 의해 집필한 최초의 한국사 통사라고 할 수 있겠다. …… 신채호는 〈독사신론〉에서 …… 한국에는 선비족·부여족·지나족·말갈족·여진족& middot;토족 등 6개의 민족이 있었는데, 한국의 4,000년 역사는 부여족이 다른 5개 종족을 정복·흡수하면서 전개된 ‘부여족 소장성쇠의 역사’라고 주장했다. …… 이러한 통사체계는 발해 이후 정통이 어디로 전승되었는지 서술하지 않았다는 문제점이 있지만, 전술했듯이 단군조선→기자조선→삼한을 계승한다고 했던 대한제국의 정통론 체계를 부정함은 물론, ‘왕조정통론’에서 일종의 ‘민족정통론’으로 변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210~211쪽, 도면회, <국사는 어떻게 구성되었는가?> 중에서

경성제대 사학과에는 일본 특유의 분류체계를 모방하면서도 식민지 조선이라는 특수성을 반영한 세 전공을 두었다. 본국의 제국대학과 달리 ‘동양’이라는 지정학적 특성에만 국한하여 국사학, 조선사학, 동양사학을 전공으로 두었던 것이다.

앞서 이노우에 데쓰지로의 〈동양사학의 가치〉를 인용하며 지적했던, 동양사학이 타자로서의 서양과 대등한 위치에 서기 위한 담론이며, 그 안의 일본문화가 ‘동양’을 서양에 드러내는 일종의 표상으로 강조되었던 점은 여기서 다시 한 번 상기할 만하다. 경성제대의 학과 편제에서 동양사학은 일본적 오리엔탈리즘의 지적 지배를 위해 마련된 “규율과 훈련질서의 분류체계”에 따라 성립되었던 것이다.

― 227쪽, 박광현, <식민지 조선에서 동양사학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중에서

 

 

6. 민족/국가 기획으로서의 한국 현대역사학

― 이 책의 주요 내용 2

 

이 책의 2부에서는 1945년 이후 형성된 한국 역사학을 이기백, 김용섭, 민석홍 등 한국의 대표적 역사학자의 역사학을 비판적으로 검토함으로써 ‘민족/국가 기획으로서의 한국 역사학’의 성격을 고찰하였다.

김기봉은 민족주의 역사학의 정치적 성격을 비판하면서 실증적 역사연구를 통해 진리를 발견하고자 한 이기백의 역사학을 살펴보았다(<민족과 진리는 하나일 수 있는가?>). 그는 이기백이 주장한 실증사학이 대부분의 역사분쟁에서 보듯이 오히려 민족주의 대신 국가주의를 지향하는 모습으로 원용되었다고 지적하였다. 한국사학사에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은 냉전체제의 폭압으로 ‘사외경제사학’이란 명칭으로 서술되어왔는데, 이후 ‘내재적 발전론’이란 이름으로 진보 역사학계의 대명사처럼 사용되어왔다. 윤해동은 내재적 발전론자의 대표자인 김용섭의 역사학의 구조를 총체적으로 분석, 비판하였다(<‘숨은 신’을 비판할 수 있는가?>). 그는 김용섭의 내재적 발전론이 민족주의와 발전론을 박정희정권과 공유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근대 국민 만들기에 이데올로기적 기반을 제공했다고 비판했으며, 내재적 발전론을 구성하는 자본주의 맹아론, 식민지 수탈론, 두 가지 길 이론, 민족국가 수립이론 등은 모두 서구 근대를 전범으로 설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럽 중심의 오리엔탈리즘을 재생시킬 위험을 안고 있다고 분석하였다. 또한 내재적 발전론이 민족 지상, 국가 지상, 근대 지상의 논리 위에 구축되었기 때문에 완결된 민족과 국가의 형식, 근대가 곧 선이라는 환상을 조장하고 현실 비판의식을 마비시킨다고 비판하였다.

육영수는 1970년대까지 한국 서양사학계의 개척자 민석홍을 통해 한국 서양사학이 국가/근대화 기획으로서 복무했음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였다(<국사/근대화 기획으로서의 서양사>). 민석홍은 이기백과 달리 반실증주의적·현재주의적 관점에서 역사적 현재가 역사연구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유럽중심주의 역사관을 토대로 4·19혁명을 옹호하고 5·16군사쿠데타를 비판했으나 1960년대 후반 이후부터는 공업화와 경제성장이 시급한 과제라 하면서 박정희정권의 국가/근대화 기획을 옹호하는 모습으로 변모했는데,육영수는 그 사상적 변화과정을 면밀히 짚어나갔다.

김용섭은 이중적인 의미에서 한국 역사학계의 ‘숨은 신(神)’이었다. …… 그가 제기한 여러 논의를 제외하고는 한국 현대사학사를 검토할 수 없을 정도로 한국사학계에 거대한 영향을 끼쳐온 ‘거인’이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나아가 그의 논의가 1960년대 이래 내재적 발전론의 중요한 논점을 포괄하고 있다는 점에서 또한 그러하다.

― 253쪽, 윤해동, <‘숨은 신’을 비판할 수 있는가?> 중에서

사학사 연구자란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선 난쟁이’다. 난쟁이는 거인에 비할 데 없는 초라한 존재지만, 거인의 어깨 위에서 거인보다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이기백이 20세기 한국사학의 거인이라는 점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모습이 큰 만큼 그가 남긴 그림자 또한 길다. 나는 21세기 한국 역사학의 과제 가운데 하나가 이기백 실증사학의 극복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실증사학으로는 지금 우리가 국내외적으로 당면한 역사분쟁을 해결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 312쪽, 김기봉, <민족과 진리는 하나일 수 있는가?> 중에서

우리나라를 포함한 비서구세계에서 토인비의 문명관은, “새로운 성장과 발전을 위한 거대한 시련의 시대”를 극복하고 “전통사회로부터 근대사회로의 전환”을 촉구하는 “역사적인 방향감각”을 제공할 것이라고 그는 확신했다. 그뿐만 아니라 후진국 국민이 경제발전을 통해 빈부 격차와 계급 대립을 해소하고 세계 가족 공동체를 수립하는 데 토인비의 문명관이 이바지할 것이라고 그는 덧붙인다. ‘도전’과 ‘응전’이라는 토인비의 외래산 기표(記標)가 민석홍에 의해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이라는 토속적인 기의(記意)로 전환되는 순간이다. 민석홍이 각색한 또 다른 종류의 ‘전환시대의 논리’ ― 박정희정권이 수립했던 분단시대 논리에 저항했던 리영희의 그것과는 구별되는 ― 가 탄생한 것이다.

― 331쪽, 육영수, <국가/근대화 기획으로서의 서양사> 중에서

 

 

7. 역사 3분과 체제에 구속되지 않는 재일조선인의 역사를 고찰하다

― 이 책의 주요 내용 3

이 책의 2부에는 한국사이면서도 한국이라는 지리적 영역에 들어 있지 않는 재일조선인사 연구의 역사를 다룬 도노무라 마사루(外村大)의 논문(<국민도 아닌 민족도 아닌 소수자의 역사>)이 포함되어 있다. 현재의 국사 중심 체제에서는 재일조선인사와 같이 북한, 남한, 일본 가운데 어느 국가의 역사에도 포함될 수 없는 집단의 역사는 연구 대상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는데, 그렇기에 이들 집단에 대한 연구는 역사 3분과 체제의 한계를 넘기 위한 대안역사학의 성격도 지닌다. 도노무라는 해방 직후 재일조선인들은 자신들의 역사를 기억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으나 1950년대 좌파계 재일조선인들의 치안 문제나 한국과의 어업권 문제 등으로 일본에서는 재일조선인사 연구 자체가 곤란했다고 한다. 결국 재일조선인사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재일조선인 역사 연구자들의 ‘당사자 연구’를 통해 개척되어왔으며, 이들의 당사자 연구는 곧 일본사회의 변혁을 촉구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 전반에 걸친 재일조선인 역사학자의 재일조선인에 관한 역사연구는, (혁신세력까지 포함한) 일본인의 역사인식을 비판하는 것이었지만, 조선노동당과 조선총련의 정치전략에 근거한 것은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이들의 연구는 오히려 이들이 소속된 조직의 의향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 자신들과 관련이 깊은 역사를 직시함으로써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립함과 동시에, 일본제국주의로부터 재일조선인이 받아온 억압이 일본 민중과 질적으로 구별된다는 사실(史實)을 밝히고, 이제껏 민족 차별과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을 확립하지 않고 있는 일본사회에 변혁을 촉구하고자 했던 것이다.

― 388쪽, 도노무라 마사루, <국민도 아닌 민족도 아닌 소수자의 역사> 중에서

 

 

8. 과거를 망각한 일본의 전후역사학의 일방성

― 이 책의 주요 내용 4

패전 후 일본에서는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을 ‘전후역사학’이라 명명했다. 도베 히데아키(戶邊秀明)는 한국의 독자를 위해 전후역사학의 기본 구조를 설명하고 이에 대한 비판으로 동장한 야스마루 요시오(安丸良夫)의 민중사학을 논하고 있다(<‘민중사상사’ 연구의 출발>). 도베에 의하면, 야스마루는 1960년대 이후 ‘근대화론’의 대두로 봉착한 전후역사학의 위기 극복을 위해 구래의 민중 개념에 담겨 있는 수동적이고 봉건적인 이미지를 부정하고 새로운 민중 개념을 구성했다고 한다. 즉 민중의 ‘통속도덕’이란 사상의식이 봉건시대의 유교적 산물이 아니라 일본 근대화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보았으며, 이러한 민중사상사 연구는 오늘날까지 일본 역사 학계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쳐왔다고 분석한다.

1970년대 초 이시모다 쇼(石母田正)는 일본 고대사회가 민족공동체적인 사회구성을 취하는 필연적인 근거로서 아시아적 공동체론-수장제론에 기초한 고대국가관을 정립했는데, 다나카 사토시(田中聰)는 그 역사적 배경을 추적했다(<‘공동체론’의 차질>). 특히 그는, 이시모다의 연구가 사료에 나타난 다양한 이적집단의 실태를 무시하고, 고대국가 율령체제의 틀을 넘어선 이들의 자율적인 활동을 무시함으로써 일방적 역사연구로 귀결된다는 점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였다. 다나카의 이러한 주장은 일본의 전후역사학이 일본이 침략하고 지배한 외부에 대해 과거를 망각하고 애써 눈감으려 한다는 지적의 연장선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와사키 미노루(岩崎稔)는 일본에서 전후시와 전후역사학의 상관관계를 통해 역사학과 문학을 가로지르는 분석을 하고 있다(<전후시와 전후역사학의 조우>). 전후시 중 《황무지》파의 시는 전쟁에 대한 후회와 죽은 자와의 강한 격절(隔絶) 감각을 담아 ‘전후 일본사회의 출발점’과도 같은 표상이 되었지만, 그 속에는 일본의과거를 망각하는 구조가 은폐되어 있다고 분석한다.

이성시(李成市)는, 자신들의 과거 사실을 망각하고 주변 국가와 민족에 대해 배려하지 않는 일본 역사학의 구도는 동아시아세계론이 처음 출발할 때부터 지니고 있던 성격이라고 주장한다(<고대 동아시아세계론을 다시 생각한다>). 1960년대 이후 일본 역사학 연구방법론으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한 동아시아세계론의 핵심은 니시지마 사다오(西嶋定生)의 책봉체제론으로, 이를 통해 고대 동아시아국가들이 중국문명화되는 현상을 설명해왔다. 그러나 이성시는 고대 동아시아가 중국문명을 수용한 것은 책봉관계 때문이 아니라 상호관계 때문이었으며, 이는 7세기 말 신라와 일본의 율령국가 체제 형성과정을 통해 증명된다고 보았다. 특히 이성시는 체봉체제론이 제출된 사학사적 맥락을 추적해 1960년대 중국·한국·베트남·일본 등 동아시아 네 지역이 미국의 제국주의적 지배에 대항해 싸워야 하는 공통의 문제와 일체성이 있음을 밝힌다. 돌이켜보면 19세기 후반의 ‘동양’ 개념, 20세기의 ‘대동아’ 개념 등은 모두 일본이 아시아 국가들과 대화하면서 만들어온 것이 아니라 언제나 일본의 입장에서, 일방적인 모놀로그(독백)였을 뿐이었다는 것이다.

‘통속도덕 ’이란, 근면이나 검약·효행·절제 등의 덕목 묶음으로, 일상생활의 규범으로서 생활 실천에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야스마루는, 그것을 미덕으로 볼지 버려야 하는 유물로 볼지는 서로 다르지만, 대개가 봉건시대의 유교적 산물로 보는 통념을 기각시키고, 통속도덕의 실천이야말로 자기 형성적·자기 규율적인 주체를 낳아 ‘일본 근대화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파악했다. …… 야스마루가 거듭 강조했듯이, 통속도덕은 200년 이상에 걸쳐 ‘장기지속’의 형태를 띠며 형성·침투되었지만 어느 시점에서 창조된 역사적 구성물이다. 그것은 예정조화(豫定調和)적인 공동체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역으로 공동체의 붕괴에 직면하면서 선택된자기 단련의 방법이었다.

― 422~423쪽, 도베 히데아키, <‘민중사상사’ 연구의 출발> 중에서

이후 일본 고대사학 연구에서 중대한 과제의 하나는, 이시모다가 30년 전에 보여준 ‘아시아적 수장제’의 틀― 단적으로 말하면, 균질적인 공동체의 실체화 ― 을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념으로서 ‘아시아적 공동체’를 재발견하는 것이 아닌, 또 고대사회 속에서 근대적인 역사 주체로서의 개인을 재발견하는 것도 아닌, 공민/이적상을 새로 읽는 방법론이 필요하다.

― 464쪽, 다나카 사토시, <‘공동체론’의 차질> 중에서

서사시적인 것의 갈망은 국민적 역사학운동의 핵심에 닿는 요구이자 감수성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거기서는 자신들 일본민족은 결락되고 결여된 민족으로 우선 주체화되어야 하는 반면, 조선민족이나 아시아의 다른 민족해방투쟁을 하고 있는 아시아의 다른 민족이야말로 ‘규범’이 되는 민족으로 파악되고 있다. 재일조선인의 서사시로써 민족 정서가 이야기되고, 또 거기에 동일화되고 모색됨으로써 서사시적 선망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487~488쪽, 이와사키 미노루, <전후시와 전후역사학의 조우> 중에서

동아시아세계론은 전후 일본의 역사 연구자가 어떻게 세계와 마주 대할 것인가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만들어낸 역사적인 산물이었다. …… 동아시아세계론의 구성 자체는 현실과 마주 대하고 그 시대의 역사적 과제에 부응하려고 한 특수한 일본인의 문제 설정이었다. 또한 동아시아세계론은 철저한 일본사의 문제였다. 그 핵심이 일본사 문제라면 그로부터 나오는 역사적인 물음 역시 일본사 문제로 수렴되지 않을 수 없다. …… 동아시아 여러 나라가 연대해서 자신들의 (동아시아 여러 나라의) 역사적 과제에 부응하기 위한 세계사를 새로이 구상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마땅히 우리는 철저하게 현재의 동아시아 여러 나라가 안고 있는 현실 과제에서 출발해, 동아시아의 절실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과거를 물으면서 새로운 동아시아사, 새로운 동아시아세계론을 추구해야 할 터이다.

― 526~527쪽, 이성시, <고대 동아시아세계론을 다시 생각한다> 중에서

저자소개

윤해동 (엮음)
1959년에 태어나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6년부터 역사문제연구소 간사, 사무국장, 연구원과 일본 와세다 대학교 외국인연구원을 지냈고, 지금은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는 한국 근대 민족운동사-촌락사회사를 대상으로 공부를 시작하여 최근에는 ‘식민지 근대’라는 문제의식에 매달려 있다. 물론 문제의식의 이행 과정에는 근대성 비판이 자리하고 있다. 식민지 근대의 공시성과 통시성, 곧 식민지 근대의 보편적 성격을 확인하기 위하여 문제 관심을 확대해나가기 위해 애쓰고 있다. 이런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근대 역사학에 대한 메타 역사학적 비판이 필요하다는 점을 실감하고 있다. 논문으로 〈일제하 물산장려운동의 배경과 그 이념〉, 〈친일과 반일의 폐쇄회로에서 벗어나기〉 등이 있고, 지은 책으로 《식민지의 회색지대》(2003), 《지배와 자치》(2006) 등이 있다.
도면회 (엮음)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부교수.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으며, 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식민지화 전후 시기를 근대국가론의 관점에서 재조명할 필요를 느끼고 형사법과 사학사를 다시 검토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북한의 역사 만들기》(공저, 푸른역사, 2008), 《한국 근대사회와 문화 Ⅱ―1910년대 식민통치정책과 한국사회의 변화》(공저, 서울대학교출판부, 2005), 《화폐와 경제활동의 이중주》(공저, 두산동아, 2006), 옮긴 책으로는 《한국의 식민지근대성》(삼인, 2006) 등이 있다.
비판과 연대를 위한 동아시아 역사포럼 (기획)
비판과 연대를 위한 동아시아 역사포럼은 일국사적 민족주의 역사학을 비판하며 국민국가의 경계를 넘어선 새로운 연대의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해 2000년 1월에 결성되었다. 동아시아, 그중에서도 우선적으로 한일 역사연구자들이 솔직한 자기비판을 통하여 새로운 역사상을 모색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역사포럼은 일종의 네트워크로서 매년 2회에 걸쳐 한일 연구자들의 워크숍과 비정기적인 국내 공개세미나를 열고 있다.

목차

목차 전체보기

총론 한국과 일본의 20세기 역사학을 돌아보며 : 도면회(대전대학교, 한국근대사)

1부 오리엔탈리즘 속의 내셔널히스토리

‘세계사’의 일본적 전유 ― 랑케를 중심으로
: 고야마 사토시(小山哲, 교토대학, 서양근대사)
일본의 동양사학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시리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의 역사학
: 미쓰이 다카시(三ツ井崇, 도시샤대학, 한국근대사)
국사는 어떻게 구성되었는가? ― 한국 근대역사학의 창출과 통사체계의 확립

MORE

독자리뷰0

독자리뷰 쓰기모두보기

한줄서평0

현재 /1000byte 글자수 500자 까지 작성 가능하며 욕설과 비방글은 삭제됩니다.

목록으로 돌아가기상단으로

독자적인 책수다 팟캐스트